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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신부’(왼쪽)와 ‘검은 돌’(아이단 살라코바 작품). 아제르바이잔공화국 국가관에 전시됐다가 철거됐다. 얼굴까지 부르카를 덮어쓴 신부와 그 앞에 놓인 여성의 성기를 닮은 대리석 모양이 문제가 되었다. ‘검은 돌’은 아르세날 전시관으로 이전해 설치됐지만, ‘기다리는 신부’는 2t에 달하는 무게 때문에 이전 설치가 이뤄지지 못했다. 아이단 살라코바 제공 |
비엔나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예술가 그룹 젤리틴은 티센 보르네미사 현대미술 재단과 국제적으로 유명한 갤러리들의 후원을 받아 ‘젤리틴 파빌리온’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했다. 이들은 오픈 행사 기간 동안 아르세날 북쪽의 야외 공간에서 누드 퍼포먼스를 진행했고, 관람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예고 없이 바나나로 항문성교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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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출신 디자이너 가에타노 페쉐의 작품에 나체로 앉아 있는 비토리아 리시. 브루노 코르디올리 제공 |
이탈리아 국가관에는 디자이너 가에타노 페쉐의 작품에 포르노 스타 비토리아 리시가 알몸으로 나와 앉았고, 청년작가 전시가 이뤄진 아카데미아 관에는 전시장 안을 벌거벗은 남성 작가 두 명이 뛰어다녔다. 사실 이는 젤리틴의 누드 퍼포먼스에 비하면 무난해 보이기까지 했고, 당연히 이 광경을 보고 놀라는 사람은 발견하기 힘들었다. 현장에 나온 지역 교구의 나탈리노 보나차 신부만이 이를 두고 언성을 높였지만 사람들은 이런 정도의 노출은 흔하게 있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누드 퍼포먼스와 포르노 스타의 깜짝 출연이 어떤 이유에서 진행되었든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데에는 쉽게 성공했다.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 어렵게 관심에 호소하는 것과는 크게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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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베이루트가 아니다’(에텔 아드난의 단편영화 중). 레바논 국가관 초대작품으로 선정되었으나 비엔날레 참여가 취소돼 상영이 무산되었다. 7월에 베니스에서 상영이 예정되어 있다. |
레바논 국가관의 큐레이터 조지 라바스는 전시 준비가 한창이던 지난 3월 말, 레바논의 참여가 취소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참여 작품의 정치적인 색채가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레바논이 1월 중순부터 무정부상태로 지냈으나 이 사실이 원인을 제공했다고 보지는 않는다는 입장을 밝힌 라바스는 “레바논관은 실제로 존재하면서도 없는 상태예요. 이런 상태가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져주는 거죠. 정부도 없는 상태에 놓인 국가의 장관 편지 한 장이 전시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 상황에서, 이곳 베니스에 공식 국가관으로 참여해 전시를 한다는 게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지, 장관이 참여를 불허한다는 편지를 보냈으니 예술 프로젝트가 중단되어야 하는 것인지, 우리가 믿는 것처럼 예술 프로젝트가 정치권력에서 자유로우며 스스로의 에너지로 자생할 힘이 충분히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이어지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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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닐료 비올라 그룹이 주최해 이뤄진 아트 캠프 퍼포먼스 ‘해적 캠프’. ‘무국적관’ 참여 작가들이 중국관에 야외 설치된 작품 사이에 텐트를 설치하고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다. 스타브로 크리스토 제공 |
“국가관이 취소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여러 곳에서 자본을 지원해 주겠다는 연락이 왔어요. 나라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진행할 수 있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레바논 국가가 아닌 세계 여러 다른 나라 자본과 예술인들의 도움으로 만들어지는 전시가 국가관과 같은 정체성을 띨 수는 없죠. 이 프로젝트에서 레바논은 더 이상 한 나라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가 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니 5만 유로를 내면서 공식 국가관 이름표를 달 이유가 없어진 거죠.”
예술계에서 작가로 생존하기 위해 청년작가들은 대형 미술행사를 따라 여러 나라를 이동하며 국제적인 네트워크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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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공간’(자메이카 출신으로 덴마크에서 활동하는 미쉘 에이스트럽 작). 베니스 곳곳에 있는 빈 공간을 찾아 실제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레바논관에 관련된 사진 연작을 만들어 레바논 예술 프로젝트를 지원하고 있다. |
이탈리아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코닐료 비올라 그룹은 ‘무국적관’으로 이름을 붙이고 5월 31일부터 6월 6일까지 베니스에 해적 캠프를 열었다. 심사를 거쳐 16개국 출신의 젊은 작가들이 초대를 받았고, 국적과 국가 경계를 초월한 상태를 요구받는 작가의 현 상황을 테마로 채택해 실행에 옮겼다. 이들은 여러 주요 국가관이 위치한 자르디니에 뛰어 들어가 해적 텐트를 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비엔날레 장에서 캠핑을 하는 행위는 불법이라 경찰이 출동했지만 이들은 비엔날레에서 참여를 승인받은 행사라며 공식 마크를 보여주며 맞섰고, 결국 경찰들은 뒷짐을 지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해적 캠프를 두 손에 든 이들은 즐거운 소란을 피우며 여러 국가관 사이를 뛰어다녔다.
코닐료 비올라 그룹의 시도는 상당히 긍정적이었지만 파장 효과가 얼마나 크게 오래갈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이미 존재하는 권위에 도전하고 그것을 전복시키려는 시도가 너무 많다 보니 이제 그 시도 자체가 구식처럼 보이는 위기에 다다른 듯하다. 하지만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을 더 이상 구분하지 않고 자극에만 반응하는 관람객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끌기 위한 노력을 멈출 수는 없는 일. 이런 크고 작은 시도들이 작품보다는 전시관의 권위를 먼저 보고 예술 프로젝트의 내용보다는 스타 작가의 이름을 확인하는 예술계의 현 상황을 조금씩 개선시켜 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조각·미술설치가(밀라노) hojin0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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