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랍 대신에 주물용 왁스 쓴듯
제작자 기술 보유 여부도 논란 전통 범종 주조방식을 재현했다고 알려진 선림원종이 현대방식으로 제작된 것으로 확인됐다. 대전 국립중앙과학관에 전시 중인 이 종은 맥이 끊긴 옛 밀랍주조 방식을 되살려낸 작품으로 소개돼 왔다. 이 종은 최근 깨진 채 납품된 사실이 드러난 광주 ‘민주의 종’을 제작한 인간문화재가 복원한 것이어서 전통 기술 보유 여부 논란이 재연되고 있다.
〈세계일보 4월25일자, 10월27일자 참조〉
29일 학계와 종 제조업계 등에 따르면 국립중앙과학관은 2004년 10월 전시설치 전문가인 Y씨와 1억원에 ‘청동종 제작기술 전시물’사업을 계약했다. 밀랍 등 전통 방식을 써서 범종을 복원하고 제작 도구와 재료, 제작 공정을 관람객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사업이었다.
이에 Y씨는 종 제작을 중요무형문화재 112호(주철장) 원광식씨에게 3000여만원에 맡겼다. 원씨는 6·25전쟁 때 소실된 선림원종을 전통 밀랍주조 기법으로 복원하기로 하고, 3개월 만에 과학관에 납품했다. 상원사 동종, 성덕대왕신종과 함께 신라시대를 대표하는 명종인 선림원종은 1948년 강원도 명주의 선림원지에서 출토된 뒤 월정사로 옮겨 보존되다 6·25전쟁 때 불타면서 파손됐다.
최근 취재팀이 선림원종을 확인한 결과 종 윗부분에 붙어 있는 용뉴와 음통 안쪽에 하얀 세라믹(콜로이달 성분) 성분이 제거되지 않은 채 달라붙어 있었다. 세라믹은 내화력이 뛰어나 현대 주물 방식에서 널리 쓰이는 화학물질이다. 전통 범종 주조방식에서는 흙을 주성분으로 하는 주물사로 거푸집을 만들기 때문에 세라믹이 묻어 있을 수가 없다.
전통 범종 주조방식을 적용하지 않았다면 종 모형(몸체)도 옛 방식의 밀랍 대신에 주물용 왁스를 썼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종이 전시된 과학관 1층에는 ‘국내 최초로 겨레 과학기술인 청동밀랍주조 기술을 찾아내 종의 원형을 되살려 냄으로써 그동안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도 복원할 수 있는 원천기술을 확보하게 됐다’고 적힌 안내문이 설치되어 있다.
이와 함께 선림원종 비천상을 새기는 데 쓴 전통 소재라고 소개된 이암판도 현대식 석고에 색을 입혀 이암처럼 보이게 한 것으로 드러났다. Y씨는 “이암판에 문양을 조각할 수는 있는데, 과학관에 전시한 것은 석고판”이라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범종 복원 주요 과정을 사진 등으로 찍어 국가 문화재기록화 사업 일환으로 ‘주철장’이라는 책까지 만들었으나, 전통 방식 적용 여부를 검증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장무 서울대 교수와 최응천 동국대 교수 등이 제작 자문에 참여했다.
원씨 측은 “제작비 3000여만원으로는 그렇게(현대방식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전통 기술 보유 논란에 대해서는 “내년 3월쯤 시연회를 열어 보이겠다”는 입장이다.
과학관 측은 “이장무 교수와 최응천 교수가 자문 보고서에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훌륭한 종이다’, ‘선림원종을 완벽히 재현해 냈다’고 평가해서 전통기법으로 제작됐다고 믿었다”며 “현대식으로 만든 사실이 드러나면 선림원종을 과학관에서 치울 것”이라고 밝혔다.
특별기획취재팀= 박희준·신진호·조현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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