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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자 시인의 동유럽 언플러그드] ⑦ 크로아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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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04-26 18:25:33 수정 : 2012-04-26 18: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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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숲속에 큰 호수 16곳
크고 작은 수많은 폭포 장관
플리트비체 공원 유럽 최고의 비경
창밖을 내다보니, 허공에 봄꽃이 날리고 있다. 그곳에 봄이 있었다는 것을 마치 처음 안 사람처럼, 나는 새삼 놀라고 만다. 저 겹겹의 연분홍 레이스 같은 것들은 날리면서 스러지면서 이 세계를 꿈결처럼 만드는 중이다. 생각하건대, 어린 나는 늘 모든 시절이 연분홍 레이스처럼 기억되기를, 각인되기를 꿈꾸었다. 레이스처럼 매순간이 우아할 수 있기를! 그러나 많은 기억들은 남루하게 혹은 조각조각 기워진 채 남겨지거나, 터무니없이 압축된 채 희미하게 떠오르곤 했다.

옐라치치 광장 뒤 오전에만 장이 서는 돌락 시장. 꽃과 과일, 야채, 기념품들과 친절한 상인들이 있다.
반 세기의 태풍이 지나간, 자그레브


크로아티아를 여행하면서, 나는 바람의 맨살 같은 그 시간이 부디 압축되지 않기를, 그대로 고스란히 내게 스며들어 나란 사람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를 바랐다. 그 바람이 이루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자그레브 중앙역 앞 거리의 흰 자작나무가 뱉어내던 고요한 숨을, 대성당 앞 성물 판매대에서 나를 안아주던 나이든 수녀님의 눈빛을, 플리트비체의 터키색 물빛을 기억한다. 그리고 아드리아해의, 시안 블루.

돌산을 뚫어 낸 고속도로를 한 나절 넘게 달려 발칸반도의 북쪽,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 도착했고, 아파트먼트에 짐을 풀고 나니 몸이 시든 푸성귀처럼 나른해졌다. 사방이 서먹서먹했고, 허기가 졌다. 슈퍼에서 사온 수프를 끓여 먹으려 그곳 낡은 숙소의 부엌 싱크대를 열었는데, 안에서 낡고 빨간 법랑냄비가 나왔다.

made in yugoslavia. 문득 들여다본 낡은 냄비의 바닥, 거기에서 사라진 옛 유고 연방의 이름을 발견한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미리 방값을 치르며 주인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낯빛이 붉은 이 발칸의 사내는 퉁명스레 말했다.

“아직 그 무덤의 흙도 다 안 말랐어요.”

이곳은 사라진 유고슬라비아의 땅. 공산 치하와 오랜 내전(1991∼2001)으로 수백만 명이 피를 흘리고, 남은 자들의 울음이 이제 간신히 멎은 곳, 아니 멎기를 기다리는 곳. 주인은 사라진 연방공화국에서 만든 냄비에 수프를 끓이고 스튜를 끓이고 찻물을 올렸을 것이다. 늙은 그는 국물을 훌훌 들이켜다가 가끔씩 그날들을 떠올렸을까. 그 마음이 잘 가늠되지 않았다. 나는 작은 가방을 메고 반 세기 동안의 태풍이 지나간 그 거리에 나섰다.

고풍스럽지만 현대적인 느낌이 나는 건물은 모두 내전 이후에 세워진 것이다. 구시가지로 가는 트램을 놓치고는 나는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자그레브 관광의 시작이라는 중앙역 역사(驛舍)의 담장은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가 열리는 도시답게 색채들이 살아 꿈틀대는 벽화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라즈베리색, 이끼색, 아드리아 해에서 건져낸 새파란 물빛 물감들은 길고 울퉁불퉁한 담장 위에서 재미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자그레브 중앙역 앞 크로아티아의 국부였던 토미슬라브 왕의 동상.
벽화를 구경하며 걷다 보니 금세 중앙역 앞 토미슬라브 광장이었다. 국부 토미슬라브 왕의 동상 뒤로 드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정돈된 꽃밭 사이사이로 젊은 여행객들이 누워 있었다. 계속 트램을 따라 걸으면 옐라치치 광장이 나오는데 이 광장 뒤가 돌락 시장이다. 오전에만 장이 서는 이곳은 싱싱한 꽃과 과일, 기념품으로 유명한 자그레브의 명소. 오후에 가니 벌써 나무 좌판이 거의 텅 비고 빨간 파라솔도 여기저기 접혀 있었다. 목각 공예품들을 파는 좌판 앞에서 나무 인형들을 정리하던 아가씨는 아쉬운 표정으로 구경하는 내게 작은 목각 호루라기 하나를 불쑥 손에 쥐어준다. 내가 지갑을 열자 그녀는 됐다며 손사래를 쳤다.

“흐발라!”

나는 여행 책자에서 간신히 배운 인사말로 그녀에게 고맙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호로로, 조용히 호루라기를 불어보면서 나는 그 앞 붉은 장미 넝쿨이 늘어진 성 스테판, 자그레브 주교좌 성당을 찾았다. 황금 성모상이 서 있는 이 대성당은 내전과 화재로 입은 손상 때문에 여전히 공사 중이어서 외부 벽면은 커다란 걸개그림으로 덮여 있었다. 5000명이 동시에 미사를 드릴 수 있다는 이 거대한 성당은 900년 전에 완공된, 자그레브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높은 건물이다. 나는 성당의 옆문을 통해 들어가서 십자가 고난상 앞에서, 대리석 제대 앞에서, 천사가 받치고 선 독서대 옆에서 앉아 침묵했다. 그리고 손으로 크나큰 마호가니 의자를 쓸어 보았다(이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의자라고 한다). 해묵은 것들의 이 빛을 나는 사랑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세상에는 말없이 그저 한 번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마음이 묶이는 곳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곳 성물 판매소에서 만난 늙은 수녀님은 말이 통하지도 않는 나를 몇 년 만에 만난 손녀처럼 안고 쓰다듬어 주었다. 마치 내가 걸어온 길의 돌부리들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도 통하지 않는 그녀와 맞잡은 손의 온기에 대해, 그녀의 미소에 대해, 우리가 나눈 말들이 허공에서 어떻게 얽히면서 어떻게 묶여졌는지에 대해 그 방식을 설명할 길은 없을 거다. 그러나 나는 정말 따끈해졌다. 

터키색 물빛이 일렁이는 호수의 한낮.
요정이 사는 호수, 플리트비체

많은 유럽 사람들이 그곳에는 요정이 산다고 했다. 사파이어 블루의 깊은 호수 저편에 초록색 머릿결을 가진 요정이 있다고 말이다. 그것이 은유적인 것이든 상상의 이야기이든, 그들이 평생에 한 번은 꼭 가보고 싶어 한다는, 크로아티아 국립공원 플리트비체에 나도 가보고 싶었다.

자그레브에서 차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공원은 짙은 안개가 끼어 초입에서부터 으스스했다. 꼭대기가 보이지 않을 만큼 키 큰 나무 덕분에 어디나 울울창창한 그늘이어서 발끝까지 금세 서늘해졌다.

호수는 워낙 커서 공원 입구에 여러 개의 코스를 소개하고 있는데, 어쨌든 다 돌아보려면 걷고, 배를 타고, 버스를 타고서도 하루가 걸린다. 표를 사고 공원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사방에서 쩌렁쩌렁 물소리가 울렸다. 전날 내린 비 때문에 산에서 떨어져 내리는 폭포는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인지 위로 솟구치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거세게 쏟아져 내렸고, 그 기세는 사뭇 무섭기도 했다. 사람들은 일렬로 줄지어 나무다리를 건너 한 호수에서 다음 호수로, 감탄사를 내지르며 사진을 찍어대며 건너갔다. 16개의 큰 호수와 수십 개의 소들, 물속에서 자라나는 나무들과 물빛을 닮은, 두려움을 모르는 물고기들. 너무 맑아서 속이 다 비치는 몇 개의 큰 호수를 지나서 나는 낡은 벤치에 길게 누웠다.

이토록 명료하게 자연 속에 있다는 사실, 신이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이 사무쳐 잠시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도 푸른 물고기가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때, 아버지와 함께 작은 배낭을 메고 오던 열서너 살 된 남자아이 하나가 내가 앉은 벤치에 가방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다리 아래 얕은 물가로 내려가 발을 쑥 담그는 거다. 나는 놀라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호수에 발을 담가도 돼?”

“안 돼요? 수영도 아닌데. 물이 정말 시원해요.”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의 호수들. 호수 안의 다리들은 모두 나무로 만든 것이다.
남자애가 씩 웃으며 말했다.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그 아이와 함께 발을 담가 보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내가 읽지 못한 어느 경고문에 호수에 들어가지 마시오, 같은 문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 숲과 호수의 정령들이 나올 것 같은 물에 발을 담그면 죄책감이 들 것도 같았지만, 저항할 수 없는 심정이 되어 나는 조심스레 샌들을 벗었다. 그리고 다리에 앉은 채 천천히 물가에 한 발을 넣어 보았다. 바닥은 물풀과 이끼로 미끄럽고 천천히 물고기들이 몰려들었다.

기뻐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그저 소리 없이 웃기만 할 뿐. 하얀 잔뿌리가 발바닥 아래로 자라나 물속으로 뻗어 갔다. 순결한 호수의 영혼이 발바닥부터 머리까지 치고 올라왔다. 그곳에 내가 있었다. 푸른 물속에 비친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숲 바깥의 일은 온전히 잊은 채, 어쩌면 요정에게 홀린 듯이. 나는 그곳에 머물렀다는 것을, 그 물빛에 젖었다는 것을 실감하기 위해 끝없이 제 살을 꼬집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루는 영원 같고, 영원은 꽃잎 같았던 플리트비체에서의 하루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이미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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