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밀항시기 등 조율… 화성 궁평항서 도주직전 체포
평소 ‘서울대 법대 출신’ 사칭 영업정지 사흘 전에 200억원을 인출해 중국으로 밀항하려다 ‘덜미’가 잡힌 김찬경(56·사진) 미래저축은행 회장의 실체가 드러났다. 그는 30여년 전 ‘가짜 서울법대생’ 사건의 장본인이다. 6일 검찰에 따르면 김 회장은 지난 3일 오후 8시30분 밀항 알선책 3명 등 4명과 함께 경기도 화성시 궁평항 선착장에서 해경에 체포됐다. 그는 우리은행 수시입출금식 계좌에 예치된 저축은행 돈 200억원을 현금과 수표로 인출한 뒤 중국으로 밀항하려 한 것으로 드러났지만, 체포 당시 1200만여원과 여권만 갖고 있었다고 한다.
김 회장이 오래 전부터 선박과 항포구를 물색하기 위해 밀항 시기 등을 밀항 조직과 조율해왔다는 얘기도 들린다. 김 회장은 금융당국이 영업정지라는 목줄을 죄오자 5만원권 240장을 가지고 밀항 알선책 오모(49)씨와 함께 고깃배 선실에 숨어있다가 해경에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저축은행 비리 합동수사단은 200억원의 행방을 쫓고 있다. 7일 구속영장을 청구할 방침이다.
검거된 김 회장은 서울대 법대 출신 검사장들 사이에서 ‘동문을 사칭’한 인물로 유명하다. 미래저축은행에 영입된 서울대 법대 출신 인사 등 그를 알고 있는 지인 상당수는 여전히 서울 법대 출신으로 알고 있다는 게 복수의 검사들 전언이다.
금융위원회가 솔로몬·한국·미래·한주저축은행을 부실 금융기관으로 결정하고 6개월 영업정지와 경영개선명령을 내린 6일 서울 서초구 서초2동 미래저축은행 본점 출입문이 굳게 닫혀있다. 연합뉴스 |
김 회장은 서울대 법대 복학생 행세를 하며 4년간 캠퍼스를 누비다 83년에야 덜미가 잡혔다. 당시 79학번 검사장들은 사석에서 그를 ‘형’이라 부르며 술자리를 여러 번 했고, 자연스럽게 동문 선배 대우를 해줬다고 한다. 그는 꼬박꼬박 강의를 듣고 동아리 활동을 했으며, 82년 법대 교수 주례로 간호사와 결혼까지 했다. 현역 검사장이나 부장검사 중엔 그의 결혼식을 기억하는 이들이 제법 많다. 당시 그는 검정고시 출신 법대생 대표까지 맡았다고 한다. 그의 사기행각은 졸업사진 촬영 후 주소록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발각됐고, 30여년 전 신문지면을 장식한 ‘가짜 서울법대생 사건’의 장본인이 됐다. 그는 가정교사를 했던 집을 담보로 은행 융자를 받기도 했다. ‘가짜’라는 게 들통난 이후인 84년에도 그는 서울대 법대에 다니는 것으로 속이고 가정교사 일을 계속 했다고 한다. 당시 그를 형처럼 따랐다는 모 검사장은 “살다 살다 별일을 다 겪는다”며 분통을 터뜨렸다고 한다.
그는 동문을 사칭하며 미래저축은행에 서울 법대 출신 인사를 여럿 영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도 동문 선배의 ‘러브콜’로 알고서 저축은행에 발을 디딘 셈이다. 충남 예산 출신인 김 회장은 신구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것으로 확인됐다. 수사팀의 한 검사는 “제일저축은행 유동천 회장이 고대 경영학과 출신임을 사칭했다는 건 들었지만…”이라며 황당해했다. 김 회장은 밀항하려다 체포돼서도 “그냥 배를 타려고 했을 뿐”이라고 발뺌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재영·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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