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경영자는 '항시 위험수반'
선의의 일에 '경영 판단' 인정
시장경제 자유로운 경쟁 보장
배임죄 논란이 다시 뜨거워지고 있다. 대기업 오너에게 법원이 잇따라 배임죄를 적용한 데 이어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마저 처벌 강화를 들고 나오고 있다. 배임죄는 대기업 오너가 구속될 때마다 등장하는 단골 메뉴다. 기업을 경영하는 최고경영자들에게는 아킬레스건과 같은 존재다. 재계에서는 ‘기업인 잡는 요술방망이’, ‘자유시장경제를 주눅들게 만드는 이현령비현령의 법 조항’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대선 후보들이 경쟁적으로 ‘재벌개혁’을 슬로건으로 내거는 탓에 기업들의 걱정은 더 크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관계자는 “경영행위에 그런 식의 법 잣대를 마구 들이대면 기업인은 자유로운 경영판단을 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역동적인 기업경영은 사라지고 소극적인 경영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배임죄를 둘러싼 논란을 진단해본다.
◆‘경영판단’과 ‘배임’
구미 선진국에서 배임죄는 반드시 ‘경영판단의 원칙’이 적용된다. 신중하고 성실하게 경영상의 결정을 내렸다면 그 결정이 사후에 잘못된 것으로 판명 나더라도 경영상 판단이 사법심사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판례법으로 정착됐다. 우리나라 법원에서도 경영판단의 원칙을 인정한 사례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법리가 오락가락하는 탓에 재판부에 따라, 정치적인 판단에 따라 배임죄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사회가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신의성실에 따라 행동했다면 회사에 대한 최선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신뢰를 바탕으로 행동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판례가 있다. 경영상의 결정이며, 주의를 기울여 개인적인 이해관계 없이 선의에 따라 행한 일이라면 ‘경영판단의 원칙’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이는 기업 오너의 경영상 결정이 언제나 위험을 수반하는 일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시장경제가 경쟁을 통해 꽃피게 하기 위한 원칙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도 ‘경영판단의 원칙’이 적용된 사례가 있다. 1998년 삼성전자의 이천전기 투자 실패와 관련된 주주대표소송이 대표적이다. 당시 1심 법원은 삼성전자가 이천전기를 2000억여원에 인수했다가 95억원에 처분하는 과정에서 경영 정상화를 위한 소요비용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사들의 책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고등법원은 구체적인 검토와 합리적 과정을 거쳐 인수를 결정한 만큼 경영판단의 원칙이 적용된다며 이사들에게 책임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 사안은 2005년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이천전기의 부도를 막기 위한 지급보증 및 출자행위가 삼성전자까지 거래은행의 적색거래처로 분류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2004년 7월 대한보증보험이 신용도가 떨어지는 종합개발회사에 기술개발자금 69억원을 지급보증한 사건에서도 법원은 심사위원회 의결 등 적법절차를 거친 경영판단이라는 이유로 배임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화그룹의 김승연 회장도 유사한 사안으로 재판을 받고 있다.
기업들은 경영판단의 원칙을 무시하고 배임죄 적용을 강화하는 정치권의 움직임을 걱정하고 있다.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서는 횡령·배임 혐의로 5억원 이상 50억원 미만 이상 재산상 이득을 볼 경우 배임죄의 법정형을 7년 이상(현행 3년 이상)으로 강화하는 법안을 내놓았다. 대통령 사면권까지 제한하는 조항도 포함하기로 했다.
이를 둘러싸고 불완전한 법 조항에 판사의 재량권까지 원천봉쇄, 기업인을 범죄인으로 내몰게 될 것이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대법원 사법연감에 따르면 지난해 횡령·배임 사건(1심 기준) 5716건 중 실형 선고는 1496건(26.2%)이었다. 집행유예는 2081건(36.4%)에 달했다. 판사의 재량권을 없애면 불합리한 양형을 양산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이 때문에 ‘포퓰리즘적 법안’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는 이로 인해 과감한 경영판단이 필요한 투자결정과 인수·합병(M&A)과 같은 결정에서 기업 오너의 경영행위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한국경제연구원 관계자는 “우리나라 법률체계에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상황에서 경제민주화 논의에 편승해 기업 때리기 일환으로 배임죄를 변질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경영판단은 회사경영 전체를 놓고 이뤄지지만 대부분 소송제기는 특정 사안으로 인한 손익을 놓고 이뤄진다”며 “현행 법률체계 아래에서도 결국 본말이 전도된 판단 아래 기업인은 범죄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가령 기업경영에서는 더 큰 이익을 위해 작은 이익을 희생하기도 하지만 작은 희생에 따른 손실만을 대상으로 배임으로 판단하면 기업인들이 당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경영자의 경영판단에 따라 ▲일부 주주는 이익을 얻었지만 다른 주주는 손해를 본 경우 ▲주주는 이익을 봤지만 채권자는 손해를 본 경우 ▲기업집단 전체로서는 이익이지만 특정 계열사는 손실을 본 경우가 과연 배임죄에 해당하는지도 문제될 수 있다. 배임죄는 유독 한국에서 많이 적용되는 법률이다. 미국에서 경영판단에 대해 배임죄를 적용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재계는 “정치 포퓰리즘에 따라 횡령·배임으로 기업 때리기를 해서는 곤란하고 경제의 활력을 찾기 위해서라도 자유로운 경영활동을 보장하도록 법률을 정비해야 한다”고 밝혔다.
최현태 기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