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전씨는 봉군을 받은 이가 35명이며, 그중 정승이 12명, 판서(상서)가 43명, 참판이 4명, 대장이 7명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고려시대에 배출된 인물들이며, 조선시대에 와서는 많이 퇴조했다. 전(全)씨 인구는 총 49만3419명(2000년 국세조사)이며, 성씨 인구 중 21위를 차지하고 있다.
반면 밭 전(田)을 쓰는 전씨는 고려 의종 때 문과에 급제, 벼슬이 좌복야와 참지정사에 이르고 담양군에 봉해진 전득시(田得時)를 시조로 한다. 문헌상에는 담양(潭陽), 태인(泰仁), 영광(靈光), 연안(延安), 남양(南陽), 안주(安州), 강화(江華), 진원(珍原), 우봉(牛峰), 정산(定山) 등이 전하나, 담양 전씨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전(田)씨는 조선시대 총 27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으며, 인구는 18만8354명(2000년 국세조사)으로 전체 성씨 중 35위를 차지하고 있다.
정선 거칠현비 고려 말 전법판서(형조판서)를 역임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불사이군의 절개를 지킨 채미헌 전오륜과 함께 한 7현을 기린 비. “눈이 올려나 비가 올려나 억수장마 질려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 든다”로 시작되는 정선아리랑의 가사는 고려가 망하는 것을 한탄한 전오륜의 한시를 우리말로 풀어쓴 것이라고 한다. |
전씨세보에 따르면 전씨의 도시조인 전섭은 온조를 도와 백제를 세운 10명이 신하 중 한 사람으로 환선군에 봉해졌다고 전하고 있다. 그 후 삼국통일전쟁 등으로 선대를 알 수 없게 되고, 8세손인 전선이 통일신라 성덕왕 때 전법판서를 지내고, 정선군에 봉해짐으로써 정선 전씨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고려 때 16관이 분관되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부여 전씨가 분관됨으로써 모두 18개 본관이 되었다고 한다.
정선 전씨는 전섭을 도시조로 하고, 그의 8세손인 전선을 중시조로 한다. 전선은 신라 성덕왕 때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지내고 정선군(旌善君)에 봉해짐으로써 그 후손이 정선을 관향으로 삼았다. 전선의 8세손 전이갑(全以甲)과 그의 아우 전의갑(全義甲)은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이 되었다. 그 후손으로는 고려 공민왕 때 예부시랑 등을 지내고 홍건적의 난을 평정하여 2등공신이 된 전이도(全以道), 고려 말기의 충신인 전오륜(全五倫) 등이 있다.
천안 전씨는 도시조 전섭의 16세손인 전락(全樂)을 시조로 삼고 있다. 그는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삼사좌복야(三司左僕射)를 지냈으며, 천안군(天安君)에 봉해졌다. 후손으로는 고려 충숙왕 때 진현관대제학을 지낸 전신(全信), 조선 선조 때 무관으로서 정묘호란 때 순절한 전상의(全尙毅), 효종 때 무관으로 훈련대장 등을 지낸 전동흘(全東屹) 등이 있다. 구한말 동학 농민운동의 지도자로 녹두장군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전봉준(全琫準)도 천안 전씨이다.
용궁 전씨 시조는 정선 전씨 전이갑(全以甲)의 13대손인 전방숙(全邦淑)이다. 그의 아들 전정민(全正敏)은 태사(太師)이며 전정민의 아들 전충경(全忠敬)은 전법총랑(典法摠郞), 전충경의 손자 전진(全璡)은 전서(典書)를 지냈다. 또, 전진의 아들 전원발(全元發)은 고려 말기 원나라에 가서 문과에 장원하고 돌아와서 조선 태조 때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외 인조 때 학자였던 전오익(全五益)도 용궁 전씨이다.
옥천 전씨의 시조는 전이갑의 12대손으로 고려 충숙왕 때 관성군(管城君)에 봉해진 전유(全侑)이다. 후손으로는 조선 초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낙향하여 죽은 전희철(全希哲)과 류성룡의 문하생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키고 이조참판·대사헌 등을 지낸 전식(全湜)이 있으며, 인조 때 도학과 문장에 뛰어났던 대사헌 전명룡(全命龍)이 있다.
경산 전씨의 시조는 전이갑의 12대손인 전영령(全永齡)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전기 예조판서를 지낸 전백영(全伯英)과 그의 5대손으로 선조 때 정언과 지평을 지낸 전경창(全慶昌)이 있다.
나주 전씨의 시조는 이갑의 15대손으로 충렬왕 때 성균관좨주를 지낸 전경(全卿)이다. 후손으로는 고려 현종 때 나주목사를 지낸 전보인(全輔仁)과 영조 때 학자로 시폐천언소(時弊千言疏)를 올린 전기대(全氣大)가 있다.
평강 전씨의 시조는 전이갑의 14대손인 전빈(全賓)이다. 그는 고려 말기에 보문각 대제학을 지냈으나, 고려가 망하자 산속에 은둔하여 절개를 지켰다. 후손으로는 전빈의 5대손인 전유형(全有亨)이 있는데, 그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며 선조 말기 문과에 급제하여 광해군 때 병조참판을 지냈다.
전주(완산) 전씨의 시조는 전이갑의 15대손인 전집(全集)이다. 그가 고려 공민왕 때 중랑장으로서 홍건적을 격퇴하여 완산군에 봉해진 것이 전주 전씨의 시초이다. 그의 아들 전지경(全之慶)은 생원이었으며, 전지경의 아들 3형제가 현달하여 전사흠(全思欽)은 부사, 전사일(全思一)은 도사, 전사경(全思敬)은 예조판서를 지냈다. 그 밖에 조선 인조 때 서예가인 전형(全滎)이 있는데, 김해에 있는 가락국김수로왕비(駕洛國金首露王碑)의 비문은 그가 쓴 것이다. 1979년 12·12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완산 전씨이다.
전봉준 초상 전봉준에 의해 시작된 동학혁명은 처음엔 탐관오리의 학정과 부정부패에 반발하여 발생했으나, 점차 조선 봉건제도 개혁과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항쟁으로 발전했다. |
전씨의 도시조인 환성군 전섭은 온조를 도와 백제를 세운 10명의 개국공신 중 한 명이다. 그 후 세계가 실전되다, 8세손 정선군 전선에 이르러 다시 시작되었다. 전선은 신라 성덕왕 때 사신으로 당나라에 가 신라의 문화를 전파하고, 당나라의 문물을 신라에 전파하였다. 이에 성덕왕이 그를 정선군에 봉하고 채녹지(농사를 짓고 세금을 거둘 수 있는 땅)를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신라본기(三國史記 新羅本紀)에 전하고 있다. 이후 정선 전씨는 18개 본관으로 분관되었다. 따라서 최근에는 정선 전씨로 합본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전선의 8세손으로 고려의 개국공신이 된 전이갑과 전의갑, 그리고 그의 사촌인 전락이 있다. 이들은 고려 개국에 기여한 삼충공(三忠功)으로 불리고 있다. 그들은 왕건이 견훤에게 포위되어 위급했던 대구 공산성 전투에서 신숭겸 등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여 왕건을 구했다. 이에 태조 왕건이 전이갑을 정선군에 봉하고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동생 전의갑은 죽산군에 봉하고 충강(忠康)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선 전씨 후손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고려 말 불사이군의 절개를 지켰던 채미헌(採薇軒) 전오륜(全五倫)이다. 그는 고려 말에 우상시(右常侍)와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역임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두문동에 은거하였다가, 김충한(金仲漢), 고천우(高天祐), 이수생(李遂生), 신안(申晏), 변귀수(邊貴壽), 김위(金瑋)의 칠현(七賢)과 함께, 정선의 거칠현동(居七賢洞)에 들어가 지냈다. 이때 머물렀던 칠현이 한시를 읊었는데, 지역 주민이 이해를 못하자 한시를 쉽게 풀이하여 지은 것이 오늘날 정선아리랑이다.
“눈이 올려나 비가 올려나 억수장마 질려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 든다. 명사십리가 아니라면 해당화는 왜 피며, 모춘 3월이 아니라면 두견새는 왜 우나”
이렇게 정선 전씨는 이성계의 조선과는 담을 쌓고 살았으며, 이로 인해 조선시대에 인물을 배출하지 못하고 가문이 퇴조했다. 그 가운데에서도 역사를 수놓은 인물들이 있는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녹두장군으로 이름이 높았던 전봉준이다. 그는 정선 전씨에서 분관된 천안 전씨(시조 전락) 사람이다. 그는 조선 말(철종) 전라북도 태인(泰仁)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역시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되었다. 30여세에 동학에 입교하여 고부 접주가 되었다가,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의 학정에 대항하여 관아를 습격하여 강탈당하였던 세곡을 농민에게 배분하였다. 그 후 조정에서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 등이 또다시 동학교도들을 체포 살해하자,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내걸고 봉기하고 정읍, 고창, 무장을 장악한 뒤 전주까지 점령하였다. 하지만, 정부에서 청나라 군대를 요청하고, 일본군대까지 개입하자 12개 시정개혁을 약속받고 휴전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침략행위를 노골화하자 격분하여 2차 봉기에 돌입하였다. 2차 봉기에서는 전봉준이 남도접주로 12만을 지휘하고, 북도접주로 10만 농민을 지휘하던 손병희(孫秉熙)와 연합하여 대일본전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우수한 무기를 앞세운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다,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대패하였다. 이후 농민군을 해산하고, 순창에 은거하며 재기를 모색하다, 부하였던 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 1895년에 교수형을 당했다. 현재도 민간에서 구전되어 오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는 민요는 녹두장군인 전봉준을 기린 노래로 알려지고 있다.
전태일 다리에 세워진 전태일 동상 아버지 전상수의 사업 실패로 상경한 전태일은 청계천 봉제공장에서 일하면서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근로자의 권익을 위해 투쟁했으나, 부당한 대우가 계속되자 “근로기준법을 지켜라”고 외치며 분신했다. |
전씨와 정선 전씨의 근현대 인물로는 의병장이었던 전덕원(全德元), 안창호 선생과 신민회를 조직했던 전덕기(全德基)가 있으며, 문화재 보호를 통해 민족문화를 보존하고자 애썼던 간송 전형필(全鎣弼)이 있다. 또 1970년대 청계피복노동조합을 만들고 분신자살해 한국노동운동의 전환기를 가져온 전태일(全泰壹)이 있으며, 5공화국의 전두환도 정선 전씨(완산 전씨)의 후손이다.
그 외 현대 인물로는 정관계에서 전예용(건설부장관), 전성천(공보부장관), 전재희(보건복지부장관), 전우영(법원행정처장), 전규홍(총무처장), 전재기(인천지검장), 전병연(전주지방법원장), 전상석(대법판사), 전병식(한국과학기술연구원장), 전부일(예비역중장), 전석홍(보훈처장), 전병우, 전정구, 전종천, 전병헌, 전현희, 전해철, 전순옥 등의 국회의원이 있다.
재계에서는 전택부(천우사 사장), 전중윤(삼양식품그룹 회장), 전응규(청주방직 회장), 전응덕(삼양식품 사장), 전상호(삼성시계 사장), 전선한(서울제강 회장), 전응규(청주방직 회장), 전재수(일신방직 사장), 전영일(국제벨브공업 사장), 전상표(현진에버빌 회장), 전의철(세광병원 원장)이 있으며, 학계에서는 전광용(서울대 교수), 전상운(성신여대 총장), 전경수(서울대 교수), 전영화(동국대학장), 전규영(한양대 의대 교수), 전종휘(인제대 대학원장), 전철환(충남대 교수)이 있고, 스포츠 연예계에서는 가수였던 전영록과 아나운서 전현무, 탤런트로는 독고성(전원윤) 독고영재(전영재) 독고준(전성우) 3대, 전광열, 전도연, 하지원(전혜림) 등이 있으며, 역도 국가대표였던 전병관이 있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운영위원장 ksh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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