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눈치에 포기… 실효성 의문
“직장풍토 고려했나” 불만 토로 대기업에 다니는 A(32)씨는 임신 8주차에 접어들었지만 매일 야근을 한다. 며칠 전 ‘근로시간 단축 제도’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팀장을 찾았지만 ‘정말 신청할 거냐’는 듯한 매서운 눈초리에 그대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A씨는 “제도를 만들 때 대한민국 조직 문화를 고려했는지 의문”이라며 “상사 눈치 안 보고 단축 근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임신부 근로자를 위한 여러 가지 제도가 시행되고 있지만 여전히 여성 근로자들은 직장 생활에 갈등을 겪고 있다. 연장 근로 등을 당연시하는 직장 문화 개선과 강력한 법적 뒷받침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정부의 일·가정 양립 정책이 실현될 수 없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많은 여성 근로자에게 이 같은 제도는 ‘그림의 떡’이다.
쌍둥이를 임신한 지 7개월에 접어든 박모(35)씨는 “여직원이 많은 문화산업 분야에 종사하고 있지만 근무시간 조정에 대해 얘기하기 어려운 분위기”라며 “그런 건 공기업이나 공무원들한테만 해당하는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출산 전후 휴가의 경우, 법에 신청과 승인절차를 명확히 명시하지 않고 있고 약자인 근로자가 회사에 신청한 경우에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임신 19주차 직장인 고모(34)씨는 “동료가 ‘이제 몇 달 뒤면 쉬어서 좋겠네’라며 농담 식으로 얘기를 던지지만 눈치가 보인다”며 “제도가 있어도 문화와 생각이 바뀌지 않는 탓에 알아서 덜 쉬고 빨리 나올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임산부의 날’ 행사 예비 아빠들이 7일 서울 송파구 장지동 산모건강증진센터에서 열린 ‘2014 임산부의 날’ 행사에 참가해 10㎏에 달하는 임신 체험복을 입어보고 있다. 이 행사는 임신·출산에 대한 긍정적 인식 확산과 가족 친화적인 사회분위기 조성을 위해 마련됐다. 이재문 기자 |
근로기준법에는 출산 전후 휴가 기간과 그 후 30일 동안 임신부를 해고한 경우에만 사업주를 처벌할 수 있도록 돼 있어, 기업들이 이를 악용할 소지가 크다.
실제로 출산 전 휴가를 4개월 앞둔 임신부 B씨는 휴가 신청 며칠 후 여직원들을 대상으로 조직개편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통보받은 뒤 해고됐다. 지난 7월에는 한 대형 보험사에 다니던 임신 6주차 여직원이 희망퇴직을 종용받다 실신하기도 했다.
박주영 민주노총 법률원 노무사는 “사용자에게 출산 전후 휴가, 육아 휴직을 신청하는 과정이 공식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사직 종용 및 휴가나 휴직 사용 제한의 종용 등의 문제가 끊이질 않는다”며 “국가기관을 통한 근로자의 직접 신청 절차를 신설해야 한다”고 말했다.
권이선·이지수 기자 2s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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