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시조’ 마고 이야기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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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 지음/마고북스/2만5000원 |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은 1993년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에 ‘스키타이 왕 단군’이란 작품을 내놓으며 “왜 단군은 이스라엘의 모세와 같은 세계적 거물이 되지 못했는가. 간단히 말하면 ‘삼국사기’가 ‘구약성서’한테 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물론 삼국사기에는 단군에 관한 내용이 없다. 백남준이 몰랐을 수도, 일부러 틀렸을 수도 있겠으나 그건 중요치 않다. 이야기가 대세가 된 시대에 한국인은 아직 전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써내려가지 못하고 있다는 게 핵심이다.
책 제목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프랑스 여배우 이자벨 아자니 주연의 영화 ‘여왕 마고’(1994)부터 떠올릴 이가 많을 듯하다. 그만큼 우리 스스로 자신을 잘 모르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마고(麻姑)는 한국사에서 단군보다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다. 신라의 충신 박제상이 지은 ‘부도지(符都誌)’라는 책에 의하면 마고는 지상에서 가장 높은 마고성의 여신이었다. 그녀의 두 딸이 또 자식을 낳아 몇 대가 지난 뒤 후손이 3000여명으로 불었다. 이들이 곧 인류의 시조라는 것이 부도지의 주된 내용이다.
‘다시 쓰는 부도지’라는 부제에서 보듯 책은 부도지의 현대적 재해석을 시도한다. 저자는 이 작업을 “모성(母性) 중심시대를 앞두고 전개되는 기원적(紀元的) 소명”이라고 설명한다. 저자에 따르면 기독교의 구약성서가 여호와, 곧 하느님 ‘아버지’의 천지창조에 관한 책이라면 부도지는 그 이전의 마고, 즉 하느님 ‘어머니’에 의한 천지개벽을 말하는 경전이다. 현대인이 부도지에 주목해야 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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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하동의 지리산 청학동에 있는 마고성. 한국사에서 단군보다 먼저 등장하는 여신 마고가 살았던 곳으로 전해진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기독교 구약성서로 대표되는 제조적 우주관은 자연과학, 자본주의 경제와 더불어 한통속이 되어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우주관으로 남성적·가부장적 세계관을 대표한다. 이에 비해 자연적 우주관은 자연 그대로의 삶을 추구하는 자연친화적인 우주관으로 여성적·모성중심적 세계관을 대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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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백남준이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한 ‘스키타이 왕 단군’. 백남준은 “‘삼국사기’가 ‘구약성서’에 지는 바람에 단군은 모세 같은 세계적 거물이 되지 못했다”는 말을 남겼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저자가 이토록 마고에 천착하는 것은 이른바 ‘모성사회’, ‘여성시대’의 표상이란 점 때문이다. 전쟁과 살육, 경쟁과 반목이 난무했던 남성적·가부장적 시대를 청산하고 사랑과 나눔, 화합과 공생의 여성적·모성중심적 시대를 열어가는 데 있어 마고는 그야말로 구심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백남준의 탄식처럼 단군은 모세한테 졌지만, 이 땅 위에 새롭게 태동하는 모성 중심시대의 기운에 힘입어 마고는 전 세계인을 감동시킬 거물로 자리 잡길 바라 마지않는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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