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은 신화냐, 역사냐?” 21세기에 이보다 인문학적으로 어리석은 질문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제 식민사관의 ‘잘못된 질문’의 덫에 빠져 단군신화는 신화가 아니라 역사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며 힘을 낭비했다. 신화학과 역사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인문학적 무지와 망발이 우리 학계를 지배했던 셈이다. “신화는 역사이고, 역사는 또한 신화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신화와 만나지 않는 역사는 없다. 일본의 역사도 아마테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 신화와 만난다. 역사는 또한 오늘의 신화로서 인식되지 않으면 죽은 역사이다. 신화는 인류가 개발한 상징복합의 역사이다. 역사가 인간(개인과 민족과 국가)의 삶을 합리적으로 기술한 산문(텍스트)이라면 신화는 그 이전에 역사를 압축하고 은유했던 집단적 시(詩)와 같은 것이다.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이라고 전하는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 단군 관련 유적이라는 성격 때문에 민족의 성지로 인식되고 있으며 지금도 해마다 개천절에 제천행사가 거행된다. 문화제청 제공, 세계일보 자료사진 |
◆단군신화는 창조신화와 건국신화가 융합된 신화
승려 일연이 ‘삼국유사’를 쓰면서 ‘고기(古記)’에 전해오던 단군신화를 기록한 것은 분명,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할 필요와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우리민족에게 창조신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단군신화는 전반부의 창조신화와 후반부의 건국신화가 융합된 신화이다.
“환인[桓國帝釋桓因(환국제석환인)]의 서자 환웅이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가지고 태백산에 내려와서…인간의 360여가지 일을 주관하고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다”는 전반부 줄거리는 창조신화에 속한다. 그 후 곰과 범이 사람이 되고자 통과의례를 거치는 이야기, 그리고 웅녀와 환웅의 사이에 단군이 탄생한 이야기는 건국신화이다.(박정진 지음 ‘단군신화에 대한 신연구’ 참조)
단군기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정체성 확인 대목이다. 즉 단군이 건국한 시기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고(唐高·요임금)가 즉위한 지 50년 경인년(庚寅年)이다.”
왜 건국신화를 쓰면서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이라고 ‘요임금’을 의식했을까. 말하자면 중국에 요임금이 들어서면서 그것과 구별되는 조선의 정체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찬란한 고대문명을 이룬 동이족은 농업기술의 발달과 농업생산량의 증대로 인해 제후국이던 요(堯)가 본국에 대해 반란을 일으킴에 따라 점차 문명의 중심권에서 벗어나게 되고, 주도권을 빼앗긴 동이족은 자신의 정통성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문명의 주도권을 잃은 고대 조선이 동북아시아에 전해 내려오던 단군신화 계통을 정리하면서 정통성을 확인했던 것이다.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는 “황제헌원(黃帝軒轅, BC 2692∼2562년경)의 때에 신농(神農)씨의 치세는 쇠미해 있었다. 제후들은 다른 부족을 침략하여 포악하게 서로 죽이는 것을 일삼았다. …제후들은 모두 황제에게 귀의하였다. 그러나 치우(蚩尤)는 포학하여 끝내 정벌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고 전한다.
배달국 14대 치우천황과 황제헌원의 갈석산(碣石山) 전투는 단군 이전에 벌어진 동이족과 화하족 간의 최대 전쟁으로 두 족속이 갈라지는 배경 역사로 이해할 수 있다. 갈석산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기 때문에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과 이북의 고대 조선의 경계로 맞아떨어진다. 황제를 이어 신흥 세력으로 부상한 중국의 요나라는 상고시대 삼황오제 신화를 중국 역사의 머리에 올렸다. 일연은 고려 후기 충렬왕 7년(1281)경에 몽고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고대 조선의 존재를 확인하는 단군신화 정리를 통해 정체성을 강화했던 것이다. 지금 중국은 동북공정식 ‘시조(始祖)공정’에 의해 당시 적이었던 황제와 치우, 그리고 염제를 삼성상(三星像)으로 조성해 그들의 공동조상으로 모시고 있다.
고려시대의 역사서인 삼국유사(사진)와 제왕운기는 단군의 고조선 건국 사실을 전하며 민족 정체성을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문화제청 제공 |
단군신화의 곰과 범은 곰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과 범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을 의미한다. 곰과 범은 동굴에서 마늘과 쑥을 먹으면서 사람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에 들어갔는데 여기서 곰은 승리하여 사람이 된다.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햇빛을 보지 않고 삼칠일(21일)을 견뎌낸 곰은 웅녀(熊女)가 되어 마침내 환웅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 이름이 단군왕검(檀君王儉)이다. 이는 물론 북방 이주 세력인 환웅 세력과 곰 부족과의 결혼동맹으로 새 나라를 건국함을 의미한다.
단군신화는 토테미즘(곰과 범)과 샤머니즘[샤먼-킹(shaman-king)으로서의 단군]이 혼합된 제정일치 시대의 정치 신앙 복합신화이다. 토테미즘은 원시 신앙이면서 부족 구성원들이 자신의 소속이나 정체성을 확인하는 원시 분류체계이다. 단군신화에서는 곰이 승리하여 웅녀가 되고, 단군을 낳음으로서 우리 민족의 조상이 되었는데 오늘날 우리에게 곰과 관련한 전설이나 민담은 도무지 전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미련 곰탱이 같은 놈”, “곰이 재주 부린다”등 부정적인 내용이 전부다. 이에 반해 곰에게 패한 범, 곧 호랑이는 전설과 민담의 주류를 이루고 있고 우리 삶에 친근하다. 호랑이 이야기는 골마다 다른 버전으로 널려 있고, 오죽하면 ‘까치호랑이’로 희화화되어 그림으로까지 전하는가.
문화상징 체계로 볼 때 곰은 시대적으로는 구석기 시대, 지리적으로는 북방(북극), 범은 청동기 시대, 곰보다는 훨씬 남쪽지방(툰드라 타이거지역)까지 생태 범위가 넓다. 문화심리로 보면 곰은 훨씬 심층에 있고, 범은 표층에 있다. 그래서 곰(감, 가미)은 신(神)과 통하고, 범은 ‘불함(밝)문화’와 연결된다.
그렇다면 곰은 어디로 갔는가. 호랑이에게 승리한 곰이 그 후에 호랑이 토템 부족에게 인구·문화적으로 흡수되었는가. 웅녀의 아들인 단군은 왜 또 죽어서 산으로 가서 호랑이로 상징되는 산신령이 되었는가. 이는 적어도 한민족의 이동과 생태 환경의 변화, 이에 따른 문명사적 변화를 내포하고 있는 듯하다.
좀 더 남쪽에 있던 범 부족이 인구를 흡수함을 물론이고 문화를 확대 재생산하여 문명을 주도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소위 ‘밝’문명이다. 지배를 당한 부족이 도리어 문화를 확대재생산하거나 토착화하는 논리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범 토템이 나중까지 생존해 우리에게 회자되는 이유이다.
한민족은 중앙아시아에서 남동 쪽으로 이동한 민족이다. 남동 쪽으로의 이동은 호랑이 생태에 가까워진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고고학적 조사 결과에 따르면 단군조선과 결부시켜 볼 만한 것으로 중국 요하 일대의 홍산(紅山)문화를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홍산문화를 이룩한 한민족의 조상들은 다시 동남진하여 한반도에서 본격적인 철기시대를 맞았을 것이다. 웅녀에게서 태어난 단군은 죽을 때는 산으로 들어가서 ‘산신령=호랑이’가 되었다.
“뒤에 돌아와서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되었다.”(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단군의 시기는 전반적으로 인류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모계의 원리에서 부계의 원리로 바뀌는 시기였던 것 같다. 단군에게는 웅녀로 인해서 모계적 특성이 남아 있다. 그래서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단군신화보다는 삼신(三神)신화, 마고할미 신화가 더 친숙하다. 단군신화는 위로는 마고신화로 연결되어야 ‘한민족 신화체계의 완성’을 이룬다. ‘부도지’(符都誌)에 나오는 마고신화는 지상의 신인 마고가 ‘율려’(소리)를 통해 만물과 인간을 만들었는데 그 결과가 단군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역사서인 제왕운기 |
단군은 국조신이면서 무교(巫敎)의 신이다. 무교(巫敎), 혹은 신교(神敎), 신선교(神仙敎)는 같은 것으로 고대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 ‘샤머니즘 제국’을 형성했던 종교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고등종교라고 하는 유교, 불교, 기독교가 생기기 이전에 인류를 지배한 종교는 무당·무격(巫覡)을 사제로 하는 신교(神敎)였던 것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부(파미르고원, 천산산맥 일대)에 있었던 샤먼제국들의 무교는 서쪽으로 가서 기독교가 되고, 남쪽으로 가서 불교가 되고, 중국으로 들어가서 유교가 되었다. 물론 샤먼제국의 하나의 세력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고대 조선을 이루었다. 단군은 몽골의 ‘텡그리’, 중앙아시아의 ‘튼리’, 만주의 ‘탁리’, 불가리아의 ‘탕그라’, 수메르의 ‘딘그르’, 티베트의 ‘탕라’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적인 용어이다. 당시의 무당은 ‘샤먼-킹’으로서 제정일치 시대를 통치했던 것이다.
그러한 무교가 그 후 고등종교에 밀려서 퇴락한 형태로 남은 것이 오늘날의 무속(巫俗)이다. 식민사학자들은 무교를 비하함으로써 단군을 비하하는 효과를 동시에 누리기 위해서 아예 무(巫)를 속화(俗化)하여 무속(巫俗)이라고 천시했던 것이다. 일본은 그러면서도 일본의 무교라고 할 수 있는 신도는 오늘날까지 발전시켜왔다.
일본은 자신의 무교는 섬기고 남(한국)의 무교는 비천한 것으로 매도하는 이율배반을 보였다. 자신의 국조신인 아마테라스 오미가미는 신격으로 섬기면서 한국의 국조신인 단군은 매도했던 것과 맥을 갈이한다. 일본인의 이중성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들에게 한국은 조상의 나라이면서 동시에 정복의 대상이 되는 나라이다.
일본의 민속학자들은 한국의 무(巫)를 겉으로는 천시하면서도 자신의 신도의 원류라고 알고 있었던 까닭에 이에 대한 철저한 민족지 조사를 병행했다. 총독부가 실시한 무속자료 조사를 집대성한 아카마쓰 지조(赤松智城)·아키바 다카시(秋葉隆)의 역저 ‘조선무속(朝鮮巫俗)의 연구’는 오늘날도 이를 능가하는 보고서가 없을 정도이다.
황해도 구월산의 삼성전(사진 왼쪽)에서는 조선시대 이래 환인, 환웅, 단군을 모셨다. 전남 곡성의 단군전(오른쪽)은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1931년에 건립됐다. 단군이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사단법인 한배달 제공 |
고대사는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사소한 자료와 편린이라도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민담이나 전설, 들판에 흩어진 금석자료들도 소중한 자료이다. 구비전승도 활용해야 하는 판국에 ‘환단고기(桓檀古記)’ 등을 위서(僞書)로 치부해버리고 아예 거들떠보지 않는 것은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최근 발굴되어 상한연대가 6000년 전까지 올라가고 있는 중국 요령성 홍산(紅山)문명의 발굴성과도 고조선 문명과의 관련성을 적극적으로 찾는 전향적인 자세가 요구된다.
환단고기뿐만 아니라 모계창세신화를 담고 있는 부도지 등도 활용하면서 민족의 신화를 적극적으로 복원해야 한다. 신라시대 내물왕(17대)∼눌지왕(19대) 때의 충신 박제상(朴堤上·363∼419)이 쓴 부도지는 ‘마고’라는 여신을 중심으로 모계창세신화를 담은 ‘신화역사복합문’이다.
한국의 마고신화는 여신을 중심으로 하는 완벽한 신화체계를 보여주면서 세계의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하다. ‘마고’는 그 자체가 ‘여신’이라는 뜻이 된다. 부도지의 마고신화는 기독교 창세신화와 대결할 수 있는 ‘모계적 창세신화’로서 세계적인 자료임에 틀림없다. 한국은 신화의 보고이다.
박정진 문화인류학자·세계일보 객원논설위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