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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小窓多明] 예술가 부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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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8-10 23:00:30 수정 : 2015-08-11 11:3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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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위해 1인5역 마다 않은 구보타
백남준이 연 신세계 더 빛나게 해야
서기 663년 9월7일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이었던 주유성이 함락되자 백제유민들은 “백제란 이름은 오늘에 끊어졌다. 조상의 묘소가 있는 곳을 이제 어찌 다녀올 수 있으랴”고 탄식했다 한다. 한국 출신의 천재예술가 백남준의 부인인 일본인 구보타 시게코 여사가 지난달 하순 세상을 떴다는 소식에 곧바로 이 표현이 떠오른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이제 더 이상 백남준의 삶에 대해서 직접적인 증언은 들을 수 없어졌다는 뜻이 될 것이다.

우리가 구보타 여사를 아는 것은 백남준을 통해서이고 그녀의 죽음을 기리는 것도 백남준의 부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 자신의 작품이 뉴욕현대미술관에 소장될 정도로 세계적 반열에 오른 예술가인 구보타 여사의 입장에서는 억울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어쩌랴. 1984년 6월 35년 만에 한국으로 금의환향한 백남준과 함께 김포공항에서 처음 한국인과 만난 구보타 여사는 생전에 친하게 지낸 존 레넌의 부인 오노 요코처럼 그리 스타일 있는 예술가의 외모는 아니었다. 하지만 백남준의 성공을 전후해서, 그리고 백남준이 9년 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항상 옆에서 그를 지켜준 예술의 동반자였다.

이동식 언론인·역사저술가
백남준의 위성예술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KBS TV를 통해 한국에 중계하는 역할을 맡았던 필자는 사전 협의나 취재를 위해 백남준과 함께 구보타 여사와도 여러 번 조우했다. 84년 6월 첫 귀국 이후 2000년 5월 뉴욕 백남준의 작업실에서 만나는 것까지 다섯 번 만났고, 2006년 백남준이 사망한 후에는 백남준의 창조에너지를 우리 젊은이에게 이어주는 기념사업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미국과 한국에서 또 만나게 됐다. 백남준을 먼저 보내고 혼자 있던 구보타 여사는 한국에서의 백남준 기념사업이 성공을 거두기를 기원하며 마음과 몸으로 이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러한 기념사업의 결실을 보지 못하고 건강 문제로 9년 만에 남편의 뒤를 따라가고 말았다.

예술가의 아내로 사는 데 가장 어려운 것이 경제적인 문제이다. 남편의 끊임없는 창작 열기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생활비를 마련해야 하는 것은 물론 백남준 같은 경우에는 많은 텔레비전 수상기나 전기적인 설비 등에 들어가는 재료비도 확보해줘야 했다. 때로는 남편의 요청에 따라 부인이 아니라 또 하나의 모델이나 예술가로서 퍼포먼스에도 나서는 등 1인 4역 혹은 5역을 마다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백남준이 1996년 6월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의 왼쪽 신경이 모두 마비된 이후에는 그의 손과 발이 돼 2000년 미국 구겐하임미술관에서의 대규모 작품전을 정점으로 하는 후반기 작업을 가능케 해주었다.

생전의 구보타 여사는 한국인 예술가의 부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백남준이 더 많은 한국인에게 제대로 기억돼 그를 잇는 많은 예술가들이 나오기를 희망했다. 그가 남편을 따라 한국에 와 남편 조상의 성묘를 하고 나서 그 기억을 되살려 무덤의 봉분 형태를 만들고 그 사이에 추억의 영상을 보여주는 수상기를 배치한 작품을 뉴욕 스튜디오에 세워놓고 언젠가는 이 작품이 한국에서 백남준 기념관에 영구 전시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는 사실 백남준이 사망한 이후에 그를 기억에서 지우고 있지 않았던가. 80년대 그의 창조정신이 꽃핀 위성예술쇼도 이미 30년 전의 일이고, 그의 퍼포먼스를 본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무엇보다 멀리 뉴욕에서 활동하다 보니 우리와는 물리적인 거리에다 정신적인 거리까지 점점 늘어났고 그의 예술에 대한 이해조차도 막연해지고 있었다. 그가 한국인이었기에 우리는 환호했지만 그의 진정한 예술성이나 천재적인 위치에 대해서는 그가 타계한 이후 사실상 망각의 시대로 들어간 상황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백남준은 이상한 행동예술을 선보이고 괴상한 영상과 설치미술을 만들어낸 작가 정도로 우리에게 기억되지만 2012∼13년 8개월 동안 미국 워싱턴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이 그의 아카이브를 정리해 장기 전시회를 하면서 그를 미술 역사상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파블로 피카소에 이은 세계의 3대 작가라고 평가한 것은 잘 모르고 있다. 스미스소니언의 이런 평가는 그가 비디오 아트라는 한 예술장르를 그 자신이 당대에 만들어냈다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다. 예술의 장르라는 것은 어느 일정한 시기에 많은 작가들이 참여해 자연스레 이뤄지는 것인데, 백남준은 그 자신이 단신으로 당대에 새로운 예술장르를 만들어내었고 그것은 그의 천재성과 노력이 그만큼 뛰어났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구보타 여사의 별세로 백남준을 보다 가까이서 증언하고 그의 예술을 그의 조국인 한국에 회귀하도록 도와줄 사람이 사실상 사라졌다. 이제 그의 예술은 냉혹한 국제 미술시장에서 홀로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나 백남준은 그가 남긴 작품만이 아니라 세계 최초로 제시한 정보화 고속도로의 개념에다 미래 사회에의 비전 등 창조적인 에너지로 이미 세계를 밝힌 바 있다. 자라나는 세대들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도록 하고 백남준이 열어보인 창조의 빛을 더 밝게 빛나도록 하는 일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한 조국 한국과 한국인밖에는 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구보타 여사는 그 일을 우리에게 부탁하고 저세상으로 간 것이리라.

이동식 언론인·역사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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