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없는 삶은 무르익지 않는다 평소 유행가라고 하는 건 도통 알지도 못했고 부르지도 못했던 아버지가 명절 직후 동서들끼리 모여 기분 좋게 불렀던 노래가 있다. 인생은 나그네길로 시작하는 ‘하숙생’이었다. 그때 이모부들이 답가로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행복이 피어나던, 남자들의 그 조촐한 술판의 분위기는 기억 속에 선명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도, 이모부들도 인생에 대해, 운명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았던 것 같다.
인간은 등에 자기 이야기를 지고 나오는 것 같다. 사실 모르면 물을 수도 없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쉽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그 물음을 화두처럼 품게 되는 것은 바로 ‘자기 이야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부터가 아닐까.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
당신은 그 누구와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한 당신의 이야기, 당신만의 이야기를 관조해본 적이 있는가. 인식이 아닌 관조 말이다. 김형경의 ‘소중한 경험’은 그 관조의 힘으로 쓴 책이다. ‘소중한 경험’은 자기 이야기를 관조하게 하는 독서모임에 관한 책이다. 김형경이 말한다.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비로소 성장한다고. 말을 바꾸면 자기 이야기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겠다. 생각해 보면 숱한 약속으로 매일 밤이 번잡해도 멀쩡한 정신으로 마음의 이야기,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모임이 얼마나 될까.
김형경은 꽤 오랫동안 독서모임을 꾸렸다. 자기 삶을 돌아보게 하고 자기 마음에 집중하게 하는 좋은 책을 정해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나 책을 매개로, 할 수 있을 만큼 자기 이야기를 하게 하는 모임이었다.
처음에 사람들은 자신의 사회적 얼굴이나 이상화된 자기 이미지를 내보인단다. 그러다가 마음에 힘이 생기고 모임이 안전하다고 느끼게 되면 아프고 두려워 마주 보지 못했던 자기 경험을 꺼내놓게 된다는 것이다.
독서모임에서 중요한 건 잘 듣는 것, 경청(敬聽)이다. 무엇보다도 상대가 하는 이야기를 도덕적으로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잘 듣는 일은 잘 말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경청은 자기 마음을 관조해본 힘에서 온다. ‘나’에 대해 느끼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데 어떻게 목적 없이, 자기 연민 없이, 윤리적 판단 기준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어줄 수 있겠는가.
책을 혼자 읽지 왜 모여서 읽나,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자기를 읽을 줄 아는 스승과 함께 대여섯이 모이면 어렸을 적 식구수가 되고, 거기서 배우고 익힌 습성이 나온다. 절대적으로 의존했던 부모와, 우정을 나누고 경쟁을 했던 형제들! 그것은 무의식에 자리한 나의 감정을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스승에 대해서 의존성이 올라오고, 스승이 나 아닌 다른 이를 대하는 태도에서 시기심이 올라오고, 이야기를 전개해가는 타인에 대해서 불편함이 올라오는 것이다. 그것은 상처 입은 내면 아이를 만나는 경험이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불편한지, 내가 누구에게 애착을 보이는지, 누구를 질투하는지, 어떤 상황에서 무기력해지는지.
시선이 자기에게로 돌아오면 비로소 나와 같은 상황에서 다르게 반응하는 친구들을 보며 용기를 얻을 수도 있고 격려해줄 수도 있고 지혜를 얻을 수도 있다. 이런 모임은 일종의 테메노스(Temenos)겠다. 테메노스란 고대 사회에서 희생제의가 치러진 장소다. 희생 제물의 피를 보는 신성한 그곳은 정교일치 사회의 중심이었다.
우리 인생에도 테메노스가 필요하다. 내가 미워하거나 애착을 보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나는 어떤 상황을 두려워하는지, 어떤 상황에서 죄책감을 느끼며 우울해지는지, 내 콤플렉스는 무엇인지를 성찰하는 시간 말이다. 그런 시간이 없으면 경험은 반복될 뿐 두께를 더하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나를 만나는 시간이겠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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