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일영 대법관 |
6년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는 민일영(60·사진) 대법관이 후배 판사들에게 ‘청송(聽訟)’의 자세를 주문했다. 청송이란 다산 정약용이 “송사를 처리함에 있어 근본은 성의를 다하는 데 있다(聽訟之本 在於誠意)”라고 말한 것에서 인용한 표현으로, 재판의 핵심은 당사자의 말을 듣는 것이란 뜻을 담고 있다.
민 대법관은 16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에서 열림 퇴임식에서 “일선에서 재판에 임하는 법관들로서는 성의를 다하여 당사자의 말에 귀 기울이고 이를 토대로 올바른 결론을 내린 후 어법에 맞고 알기 쉽게 작성한 판결문으로 판결을 선고함으로써 당사자로 하여금 승복케 하는 것이 사법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지름길”이라고 말했다. 사건 당사자들 얘기를 충분히 들은 다음 내린 판결만이 당사자들의 승복을 이끌어낼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무릇 판사는 재판장을 처음 보았을 때 풍기는 엄숙한 분위기, 재판장을 마주하였을 때 피부로 느끼는 온화함, 논리정연한 진행 후에 내리는 합리적인 결론, 이 세 가지 덕목을 갖추고 법정을 이끌어가야 할 것”이라며 “이러한 덕목을 갖춤으로써 모름지기 ‘선배에게는 편안함을 주고, 동료에게는 믿음을 주고, 후배에게는 본보기가 되는 법조인’이 되길 바란다”고 젊은 법관들에게 당부했다.
민 대법관은 후배 법조인들에게 다양한 취미를 갖고 즐길 것도 조언했다. “‘법조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가 ‘무미건조함’이 아닐까 합니다. … 저는 등산도 하고, 판소리도 배우고, 서예도 배우고 하였지만 이런 것에 국한할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든 좋습니다. 창극, 오페라, 뮤지컬, 음악회, 발레, 전시회, 영화, 연극, 박물관 탐방, 여행 등등 우리 주변에는 무미건조한 법조인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널려 있습니다. 1주일에 두 시간만 투자를 하십시오.”
대법관으로 재직한 6년 동안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재판연구관과 비서관의 이름까지 일일이 거명하며 고마움을 표시한 것은 매우 신선했다는 평이다. 민 대법관은 “저의 머리와 손과 발이 되어 충심으로 저를 도와주신 신동훈 부장판사님 등 연구관님들, 김인숙 비서관님을 비롯한 비서실 식구들의 헌신적인 노고에 각별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인사해 참석자들로부터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민 대법관은 지난 2월 신영철 전 대법관이 퇴임한 뒤 7개월 동안 양승태 대법원장에 이은 대법원의 ‘2인자’ 역할을 하면서 사법부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선거법 위반 사건 상고심 주심을 맡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13대 0의 전원일치 의견으로 파기환송 판결을 내리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혼의 유책주의와 파탄주의가 쟁점이 사건 상고심에서는 전원합의체 표결이 7대 6으로 엇갈린 상황에서 파탄주의를 지지하는 소수의견에 가담했다. 이 사건 선고는 민 대법관이 대법원에서 마지막으로 참여한 선고가 됐다.
경기 여주가 고향인 민 대법관은 경복고, 서울대 법대를 거쳐 1978년 20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판사로 임용된 뒤 서울고법 부장판사, 법원도서관장, 청주지법원장을 거쳐 2009년 대법관에 취임했다. 탈북자 인권운동으로 유명한 박선영(59) 동국대 교수가 부인이다. 민 대법관은 퇴임 후 사법연수원 석좌교수로 옮겨 2년간 예비 법조인들을 지도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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