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 인생의 캔버스에 멋진 그림 그리게 둬야 수능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탄식의 소리들이 들려온다. 부모의 기대에 못 미친 아이들의 고개는 가을 낙엽이 됐다. 이제 시작인데 너무 가혹한 풍경이다. 나름 꿈의 형상을 다양하게 그려나갈 어린 영혼들에게 부모세대의 획일적인 성공코드인 ‘단색화’만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때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단색화 교수들이 자신들의 가치를 학생들에게 강요했던 풍경이 겹쳐지는 계절이다. 당시 학창시절을 보냈던 많은 작가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추상이 아닌 구상회화를 하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고, 심지어 무시당하기 일쑤였다고.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나름의 캔버스를 껴안고 몰래 자신만의 작업을 해 나간 이들이 많았다. 소위 단색화를 이끌었던 작가들이 대학에 교수로 몸담고 있던 시절의 얘기다. 제자를 아끼는 마음에서 그랬겠지만 학생의 입장에선 엄청난 압력이었다.
시간이 지나서 성공한 작가들의 대부분은 이런 압박에 타협하지 않은 이들이다.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단색화는 학생들에겐 지나친 형식주의로 비쳐졌다. 정신성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말도 학생들에겐 그저 피상적인 언설에 지나지 않았다. 형식의 추상화가 세계에 대한 은유나 인간의 감성 등을 도외시했다고 생각했다. 자연히 그림에 대해 그럴듯한 해설이 난무하는 모습이 허세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단색화에서 보여지는 지나친 단순성과 캔버스 평면에 가해지는 무한한 반복성은 학생들에게 물화의 전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붓질을 통한 정신수양 운운은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
요즘 회화에서 구상과 추상의 경계도 허물어진 지 오래다. 젊은 시절엔 구체적 구상으로 나가다가도 나이가 들면 추상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서게 된다. 그러기에 애늙은이처럼 젊은 작가가 추상부터 시작하는 것을 만류하기도 한다.
신세대들에게 부모의 가치관은 단색화나 추상화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당장 공감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 미래에 자신들의 추상화를 그려가기 위해 지금은 자신들의 구상회화가 더 절실한 것이다.
최근 들어 회화에서 무의식의 영역이 부상하고 있다.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들다 보면 이르게 되는 인간 내면의 심원한 세계다. 그동안 초현실주의가 관심을 보였던 영역이다. 그러나 기존의 조형수단에 얽매여 만족스런 결과를 얻지 못했다는 평가다. 추상이 순수 형식에만 매달리다보니 포착하기 어려운 인간 내면의 변화상에 다가서는 데 실패했다는 얘기다.
부모세대가 무조건 기존의 성공모드에 매여 자식들을 일방적으로 내몬다면 초현실주의 회화의 꼴이 나기 쉽다. 다양한 시대 변화상을 읽어내는 자세가 요구되는 이유다.
내면 세계는 감각적 경험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진학문제로 아이와 갈등의 골이 깊다면 미술관 데이트를 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성적 대화로 풀기 어려운 문제도 예술로 다가가면 풀릴 수 있다.
붓을 들었을 때 가슴이 숲으로 우거져 있지 않으면 풀 한 포기도 제대로 그릴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림을 그릴 때는 언어와 관념마저 잊으라고 한다. 그래야 걸작의 작품이 나오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출세와 성공이라는 언어와 관념을 잊었을 때 자식은 자신의 인생 캔버스에 멋진 그림을 그려 나갈 것이다. 예술표현의 방식은 구상이어도 좋고 추상이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어떤 그림을 그려 나가냐 하는 것이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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