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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재건 '종잣돈' 된 도자기… 조선 도공 백파선이 가르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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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3-15 20:56:49 수정 : 2016-03-16 11:4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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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초대석] 윤태운 한국도예협회 회장 400여년 전 조선도공 백파선(1560~1656)은 일본으로 끌려가 재능을 꽃피운 여인이다. 정유재란이란 국난이 없었다면 그녀가 일본 도자기의 ‘어머니’로 지금껏 추앙받을 수 있었을까. 역설적이지만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꽉 막힌 조선사회에서는 여성이 도공 수련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편 김태도가 도공이었기에 그녀 역시 도자기 빚는 기술을 습득했고, 1596년 재침략한 일본군의 총칼에 못 이겨 남편과 같이 일본 땅에 끌려왔다. 하지만 조선사기장으로 대접받으며 일본 도공들에게 조선 백자기술을 전수한 그녀는 여장부였다. 그런데 일본 백자의 ‘도조’로 추앙받는 이삼평, 심당길(심수관)과 달리 그녀는 조명을 받지 못했다.

범국민조선도공기념사업회 공동회장인 한국도예협회 윤태운(69) 회장은 14일 기자와 만나 백파선에 대한 얘기를 털어놓으며, 그녀의 공덕을 기리는 데 앞장선 이유를 설명했다. 지난해 8월 일본 사가현 아리타(有田)초 시의원 구보타 시토시가 윤 회장을 찾아왔다. “일본 도자기의 어머니로 추앙받는 ‘백파선기념사업회’를 공동으로 창립하고 싶다”고 했다. 구보타 의원 등은 오는 10월 ‘일본자기탄생?아리타자기 창업 400년’의 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기념사업을 펼칠 예정이다.

범국민조선도공기념사업회 공동회장인 윤태운 한국도예협회 회장은 “조선도공이 만든 도자기는 독일의 마이센 도자기와 프랑스 리모주, 덴마크 로얄코펜하겐, 헝가리 헤렌드 자기 등 세계적인 명품도자기가 탄생하는 밑거름이 됐다”고 말했다.
남제현 기자
이에 자극받은 윤 회장과 우동주 전 외교관 등은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 라이온즈회관에서 ‘범국민조선도공기념사업회’를 출범시켰다. 총회에서 윤 회장과 우 전 외교관이 공동회장으로 선임되고, 작가 이호철씨가 명예회장으로 추대됐다. 일본 자기는 아리타에서 시작됐고, 올해가 그로부터 딱 400년이 된다. 그 역사를 만든 것이 조선도공들과 그 후예들이었다.

“일본은 임진, 정유 두 차례 대전쟁으로 피폐한 경제를 일으키는 데 조선도공을 요긴하게 써먹었어요. 지역 토호들은 앞다퉈 조선도공을 끌고 가서 가마소를 차려 부를 축적했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통해 유럽에 일본 도자기를 수출했어요.”

당시 일본의 3대 도자기 가마소 가운데 하나가 사가현의 아리타였다. 아리타는 조선도공 이삼평이 당시 지역 영주의 후원을 받아 1616년 백자도석(고령토)을 처음 발견하면서 일본 자기 탄생지가 되었다.

“어느 무렵엔가 아리타초에 있는 사찰 호온지(報恩寺)에서 그녀의 탑이 발견돼 화제가 되었어요. 그녀는 96세까지 장수했으며 활달하고 리더십이 강하며 명품인 조선 백자기를 만들었다는 기록을 현지에서 확인했지요. 구보타 의원 등으로부터 그녀의 내력을 듣고선 큰 감동으로 다가왔어요.”

윤 회장은 “그녀는 960명이나 되는 도공을 지휘하면서 아리타 도예의 어머니로 불릴 만큼 조선자기 생산에 전 생애를 바쳤다”면서 “일본으로 끌려온 지 2년 후 남편이 사망하자 직접 가마소를 운영했다”고 말했다.

일본 권위의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용비어천가’가 그녀의 삶을 다룬 소설이며, 뮤지컬로 여러 번 제작됐을 정도로 일본에선 유명하다. 백파선(百婆仙)이란 이름도 그녀가 조선백자를 닮고 자애로웠다는 의미에서 후손들이 지었다고 한다.

“2013년 방송된 MBC 역사극 ‘불의 여신 정이’의 주인공이 백파선입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까지 일본은 토기 수준의 도자기밖에 만들지 못했고, 한국과 중국에서 도자기를 고가에 수입했습니다. 임란 때 조선의 발전된 도자기술을 접하고는 정유재란 때는 아예 의도적으로 조선도공 수천명을 끌고 간 일본 측의 기록이 있습니다.”

윤 회장은 “조선도공들과 그 후예들이 본격적으로 도자기를 생산한 17세기 중반 때는 중국과 한국에서 수입하는 도자기가 전쟁 전보다 80%나 줄어든 통계가 있다. 이것만 봐도 조선도공의 역할이 당시 일본사회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했는지 알 수 있다”고 전했다.

매년 봄철 아리타 시내에서는 세계적인 도자기축제가 열린다. 백자도석을 처음 찾아내어 일본자기를 탄생시킨 이삼평을 신으로 모신 신사에서 도조제를 지내며 추모행사를 열곤 했다. 그런데도 이삼평과 동시대에 활약했던 백파선은 지금까지 묻혀 있었다. 윤 회장은 지난해 10월 일본 측의 안내로 현장을 방문했다.

“당시 방문은 백파선의 일본 행적 발굴이 목적이었지요. 구보타 의원의 안내로 백파선의 무덤을 찾았는데, 사찰 한켠의 다른 무덤들 틈에서 잡풀에 뒤덮여 방치되어 있었어요. 그녀의 무덤은 한많은 이국땅에서 누군가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는 것 같아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윤 회장은 무덤 앞에서 그녀가 평생을 그리워했을 조선의 음식, 김치와 김을 놓고 세 번 절했다고 말했다. “발견 당시 백파선의 묘비는 이끼에 덮인 채 글씨를 알아볼 수조차 없었어요. 안내가 없었다면 알 수도 없었을 겁니다.”

방문 당시 윤 회장은 호온지의 주지 스님 안내로 절 옆의 무덤들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았다. 400년간 이 사찰의 스님들이 아리랑을 이어오며 조선도공들의 아픔을 함께했을 지난날들을 생각하면서 주지 스님에게 감사의 예를 올렸다고 윤 회장은 전했다.

윤 회장은 정유재란 당시 끌려간 조선도공들의 실력이 당시로선 세계 최고였다고 말했다.

“당시 백자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중국과 조선밖에 없었어요. 17세기 유럽 연금술사들이 도자기술 개발에 매달렸으나 실패했어요. 조선도공들과 그 후예들이 만든 일본 도자기, 즉 아리타야키나 사쓰마야키(심수관 계통)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통해 유럽에 수출되면서 유럽의 왕실과 귀족들이 일본 도자기에 열광했어요. 모두 조선도공의 후예들 덕분 아니겠어요?”

윤 회장의 설명은 이어졌다. “당시 일본 지방 토호세력, 즉 영주들은 고급기술을 가졌던 조선도공들만 아리타에서 도자기를 만들도록 배려해 주었어요. 우리에게는 10세기 때 이미 인류 문명사 최고의 혁신기술이었던 도자기 기술을 갖고도 그것을 세계시장에 선보이지도 못한 채 사장시켰어요. 반면 일찌감치 그 가치를 알았던 일본이 정유재란 때 수많은 조선도공들을 끌고 가면서 우리 도자기산업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윤 회장은 “도자기 수출을 국가적으로 지원한 일본은 메이지유신 때까지 도자기를 전 세계에 수출했고, 메이지유신의 자금이 도자기 팔아 벌어들인 돈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일본 근대화의 종잣돈이었다”고 지적했다.

“우리의 물레기술은 세계 최고이며, 상감청자의 조각기술 역시 세계 최고입니다. 세계 최고의 손기술에 고난도 디자인을 접목하면 고부가가치의 다양한 도자제품을 만들어 전 세계에 수출할 수 있어요. 그런데 현실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상감청자 조각기술 인력은 다섯명이 채 안 돼요. 그나마 모두 50세가 넘어서 10년 내에 천년을 이어온 상감청자기술은 사라질 운명입니다. 보존하고 전승하는 대책이 시급해요.”

윤 회장은 인터뷰 말미에 “일본은 이를 통해 도자기산업을 부흥시킨다는 계획 아래 행사를 준비 중인데 우리는 전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고 한탄했다.

윤태운 회장은…

●1947년 경기도 여주 출생 ●명지대 대학원 최고위과정 수료 ●경기도 이천도자기조합 이사장 ●한국 도예고등학교 운영위원장 ●한국도자재단 이사 ●한국세라믹기술원 자문위원 ●초대 한국도예협회장 ●범국민조선도공기념사업회 공동회장

대담·정리=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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