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이현미의 엄마도 처음이야] <19> 함부로 대하고 있나요? 아이에겐 부모가 전부입니다

관련이슈 이현미의 엄마도 처음이야 , 디지털기획

입력 : 2016-08-13 14:00:00 수정 : 2016-08-13 10:49:32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아동학대,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 문제다
'
어린 시절 받았던 체벌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때면 뒤따르는 의문이 있다. ‘꼭 때려야 했나? 때리지 않고는 훈육이 불가능했을까?’

쉽게 잊고 쉽게 명랑해지는 아이만의 장점 덕분에 나는 자잘한 매질은 잊어버렸다. 그러나 희미해지지 않는 또렷한 기억도 있다.

5살 무렵 강원도 영월의 한 가톨릭 성당에서였다. 나는 성당 미사가 지루했다. 밖에 나가자고 조르며 떠들었다. 아무리 달래도 말을 듣지 않았던 모양이다.

결국 엄마 손에 이끌려 나갔지만 성당 구석에서 빗자루로 맞았다. “너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엄마는 소리를 지르며 내 허벅지와 팔뚝을 바늘로 콕콕 찌르듯이 때렸다. 눈물이 쏟아졌다. 엄마의 뒤편에는 미소를 짓고 있는 성모상이 있었다.

두번째는 초등학교 2학년 때의 단체 체벌이었다. 맞게 된 경위는 기억나지 않는다. 같은 반 친구 중 누군가로 인해 선생님이 화가 났고 단체로 종아리를 맞았던 살벌한 풍경만 남아있다. 친구들의 다리에 하나둘 붉은 선이 그어졌다. 내 차례를 기다리는 것도 무서웠지만, 집단 전체가 바지를 걷고 책상에 올라선 모습만으로 공포스러웠다. 엄마한테 “나는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선생님이 종아리를 때렸다”고 말했지만, 당시는 교사의 체벌을 너그럽게 이해하던 시절이었다. 담임은 고작 9살이었던 아이들을 훈육을 내세우며 자주 때렸다.

다음 해에는 아이들을 전혀 때리지 않는, 손수 작성한 편지로 희망사항을 전달했던 인자한 선생님을 만났지만 2학년 담임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지지 않았다. 학교는 폭력과 강압을 연상케 하는 단어가 됐다.

마지막은 다시 엄마였다. 10살 때 엄마가 사준 돼지저금통이 있었다. ‘돼지저금통’이라는 단어에서 왜 맞았는지 누구나 쉽게 알아챌 것이다. 나는 돼지의 아랫배를 갈라 슈퍼마켓을 향했다. 저금통을 원래 자리에 세워놓고는 들키지 않기를 바랐다.

엄마는 즉각 알아차렸다. “돈을 훔친 것”이라며 속상해했고 종아리를 때렸다. 그런데 힘 조절에 실패했다. 종아리 혈관이 심하게 터져 뒤편 전체에 시퍼런 멍이 들었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불그스름한 얼룩이 있을 정도다. 사춘기 때 이로 인해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뒤늦게 엄마랑 병원에 갔다. 의사는 “당시 내출혈이 심했는데 피가 밖으로 배출되지 못하면서 죽은 피가 남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불쾌한 기억들이지만 나는 깊은 상처를 받지는 않았다. 초등 담임은 이후로 만나지 않았고, 엄마는 비록 때리기는 했어도 나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한번도 진심으로 딸을 내친 적 없었다. 나는 엄마가 날 버릴 것 같은 불안에 떨었던 적은 없었다.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엄마가 15년 터울인 늦둥이 동생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마음이 풀렸다. 엄마는 “내가 젊어서는 별 것도 아닌 일로 널 왜 때렸는지 모르겠다. 이해심이 부족해서야. 미안하다”고 했다. 동생에게는 “아이고야”라며 뒷목만 잡을 뿐 때리지는 않았다.

부모에게 첫째 양육은 처음 경험하는 일이기에 시행착오가 있을 수밖에 없다. 동생에게도 매를 들었다면 나는 분명 엄마와 싸웠을 것이다. 다행히 엄마의 태도는 바뀌었고 그런 모습을 보며 훗날 내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한 양육 지침을 세울 수 있었다.

체벌에 대한 것도 이렇듯 강한 인상을 남기는데 아동 학대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저지르는 정말 무서운 범죄다. 나는 체벌과 아동 학대를 모두 나쁘게 여기지만 아동 학대는 어린 생명을 정서적으로도 무참히 짓밟는다는 점에서 용서할 수 없다.

친정 엄마는 체벌하면서 후회하고 미안해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행동을 교정했다. 그런데 아동 학대 가해자들은 때릴 뿐만 아니라 한 인간의 근본을 흔들며 고통을 준다. 방치하면서 외롭게 한다. 부모에게 내쳐지는 건 딛고 선 땅이 무너지는 느낌일 것이다. 마음에 큰 내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최근 햄버거를 먹고 쓰러진 4살 딸을 발로 차고 무표정하게 바라봤다는 엄마의 이야기를 접하며, 아이가 옷걸이·자 등으로 맞았다는 사실보다 학대를 당하면서도 “엄마, 엄마”를 부르며 매달렸을 모습에 더 가슴이 아팠다.

만약 어린 시절 엄마가 마음으로도 날 때렸다면 내게는 회복하기 어려운 구멍이 생겼을 것이다. 젊어서, 미숙해서, 엄마가 된 게 처음이라서, 또 체벌을 효과적인 훈육 수단으로 여겼던 당시 분위기로 인해 매를 들었던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주변에서 출산 이후 남편과 싸움을 거듭할 때 아이가 미워진다는 엄마들이 있다. “부부끼리의 생활을 전혀 즐길 수 없고, 남편은 도와주기는커녕 밖으로만 나돌 때 모든 게 아이 탓인 것 같아진다”는 것이다. 남편과의 불화로 아이를 살해한 사례는 불행하게도 매년 접하는 뉴스가 됐다.

나 역시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남편과 전면적 투쟁을 하고 있어 엄마들의 이런 심리를 알 것 같다. 하지만 아동 학대를 용서할 수는 없다. 아이의 보챔과 떼, 짜증은 정상적인 성장 과정의 모습이다. 이를 폭력으로 교정하려는 건 훈육 차원이 아니라 귀찮아서, 인내심이 부족해서, 화풀이 대상이 필요해서 폭력을 저지르는 것 밖에 안 된다. 문제의 원인이 배우자에게 있는데 아이와 싸워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얼마 전 유모차를 끌며 동네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한 여성이 우리 애(18개월) 또래의 아이랑 앞서고 있었다. 제법 큰 횡단보도였는데도 엄마는 휴대폰 통화에만 집중했다. 아이는 아장아장 걸음으로 혼자 걷고 있었다. 아이가 정차한 자동차 쪽으로 방향을 돌리자 “야!!!!!!!!!!!!!!!!!!!!!!!!!!!!!!!!!!” 여성이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서 아이를 붙잡기는커녕 수화기 너머 사람에게 양해를 구한 뒤 계속 통화를 하는 게 아닌가. 이 장면을 지켜보며 가슴이 철렁했다. ‘저런 태도가 더 심해지면 안 되는데.’ 아이가 측은해지며 마음이 착잡해졌다.

“아이를 함부로 대하고 있나요? 당신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나는 이런 문구 등을 통해 문제 원인이 어른인 자신에게 있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 아이를 상습적으로 때리거나 방치한다면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교정할 수 있도록 상담기관 등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아동 학대에 있어선 그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 문제다.

이현미 기자 engine@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안유진 '아찔한 미모'
  • 안유진 '아찔한 미모'
  • 르세라핌 카즈하 '러블리 볼하트'
  • 김민주 '순백의 여신'
  • 한지은 '매력적인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