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를 편찬하지 않는다면 뒷날 무엇을 보겠습니까.” 고구려, 백제와 치열하게 경쟁하고 협력했던 신라의 이찬 이사부가 ‘국사’ 편찬과 관련해 진흥왕에게 상주했다는 말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인데,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한 대목이라 하겠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사태와 이를 촉발시킨 최순실을 비롯한 비선 세력의 국정농단 사태. 대한민국은 이 과정에서 민주공화국과 법치주의의 소중한 가치를 다시 깨닫고 되새기게 됐지만 결코 두 번 다시 일어나선 안 될 사건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부조리한 권력과 비선 세력에 의한 국정농단 사태의 재발을 막는 출발은 역시 이번 사태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함께 사건 실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라 믿는다. ‘비선 권력 기록팀’은 이에 국정농단 사건의 실체를 최대한 정확하게 규명, 객관적으로 기록하려고 시도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질정을 부탁한다. -편집자 주
1974년 8.15 연설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과 같이 자리한 육영수 여사의 모습이다. |
1974년 8월15일 오전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박정희 대통령이 커다란 태극기 아래에서 광복절 경축사를 읽고 있었다. 박정희가 “나는 오늘 이 뜻 깊은 자리를 빌어 조국통일은 반드시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라며 북측에 불가침조약을 막 제의하던 순간이었다. ‘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피스톨 박’으로 불린 박종규 경호실장은 전구가 깨지는 소리인 줄 알았다. 소리는 극장 맨 뒷줄 오른쪽에서 세번째 자리에 앉아 있던 문세광이 권총을 뽑으면서 오발, 자신의 왼쪽 허벅지를 관통하며 내는 소리였다. 문세광은 이어 통로로 나와 박정희가 있던 연단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문세광은 연단으로 향해 달려가면서 두 번째 총탄을 발사했지만 총탄은 20m 떨어진 연설대를 맞췄다. 문세광이 방아쇠를 다시 당겼지만 3번째 총탄은 불발이 됐다. 그는 다시 제4탄을 쏘려 했다. 박정희는 이미 연설대 밑으로 몸을 숙여 보이지 않았고 귀빈석에 앉아 있던 정일권 국회의장과 민복기 대법원장, 양택식 서울시장 등은 머리를 숙이거나 의자 뒤로 몸을 숨겼다. 문세광이 쏜 네 번째 총탄이 한복 차림으로 단상에 앉아있던 육영수의 머리를 관통했다. 문세광이 제5탄을 쏘려 하는 순간, 행사에 참석한 한 시민이 발을 걸었다. 문세광이 넘어지면서 방아쇠가 당겨졌고, 총탄은 연단 위 태극기에 꽂혔다. 23세의 재일한국인 문세광은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 육영수는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이날 오후 7시쯤 사망했다(조갑제, 2006a, 141-144쪽; 문갑식 김성동 오동룡 외 2인, 2017. 1, 210-211쪽 참고).
퍼스트레이디 육영수는 1950년 주위의 소개로 육군 소령이던 박정희를 만났고 6·25전쟁 중인 1950년 12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박정희와 결혼했다. 첫 부인 김호남과 이혼한 박정희의 두 번째 아내였다. 본관은 옥천. 육영수는 박정희와의 사이에 박근혜와 박근령, 박지만 1남2녀를 낳았다.
문세광이 총격을 가한 직후 청와대 경호원들이 육영수 여사와 박정희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해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다. 사진=서울사진아카이브 |
육영수의 피격 사망은 우선 박정희 정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아내 육영수의 사망으로 박정희의 판단력이 흐려졌기 때문이다. 특히 리더로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균형 감각에 적신호가 켜졌다는 분석이 나왔다. 김종필의 지적이다. “1974년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신 뒤 대통령의 정밀한 판단력이 흐려지는 징후는 여러 군데서 드러났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생활의 균형을 잡게 해준 건 육 여사였다. 그분이 세상을 뜨자 대통령은 생각과 행동의 균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김종필, 2016, 486쪽)
실제 육영수는 생전에 ‘청와대 내 제1야당’을 자처하며 박정희에게 민심(民心)을 전달하는 창구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그의 부재로 박정희의 폭주가 더욱 심화됐다는 분석도 있다. 즉 육영수는 1963년 10월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앞으로는 가정 안에서나마 야당적인 자세로 진정한 민의와 사회의 형편을 폭넓게 받아들여 올바르게 알려드리겠다”며 ‘청와대 제1야당’을 자처하고 시민들의 목소리나 민심을 전달하려 했다. 육영수는 때때로 시민들의 생각을 박정희에게 전달하거나 당과 정치권과 상관 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고 한다(박근혜, 2000, 81쪽 참고).
박정희는 육영수 피격 5일 뒤인 8월20일 대야 강경파인 차지철(1934-1979) 의원을 경호실장에 임명했고 이듬해인 1975년 4월8일 긴급조치 7호, 5월13일에는 긴급조치 9호를 잇따라 선포하며 국정을 폭압적으로 이끌었다.
육영수의 죽음은 박근혜의 인생행로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박근혜는 육영수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영부인 역할을 대행하면서 자연스럽게 권력 의지를 갖게 된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박근혜는 육영수 피격 당시 프랑스 그르노블대에서 6개월째 유학 중이었다. 그르노블(Grenoble)은 프랑스 동남부 알프스 지역의 중심도시. 프랑스어를 공부하기 위해 박근혜는 우선 그르노블대학의 어학 과정을 신청했다. 그는 학교와 가까운 곳에서 하숙하고 있었다(박근혜, 2007, 72-73쪽 참고). 어머니 피격 당시 친구들과 여행 중이던 박근혜는 하숙집으로부터 ‘급히 돌아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는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말에 기차를 타고 하숙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어머니를 걱정했다.
박근혜가 하숙집에 도착해보니 주불한국대사관에서 나온 사람들이 있었다. 서둘러 귀국해야 했다. 그는 짐도 챙기지 못한 채 공항으로 향했다. 탑승 수속을 하기 위해 걸어가다가 가판 신문에서 어머니 사진 위에 쓰인 ‘암살’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신문을 급히 펼쳐 보았다. 박근혜는 “온몸에 수만 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쇼크를 받았다. 날카로운 칼이 심장 깊숙이 꽂힌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는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는 내내 쉬지 않고 울었다(박근혜, 2007, 83-84쪽 참고).
어머니 육영수는 박근혜에게 ‘언제나 따뜻이 감싸 안는, 이해와 사랑으로 충만한’ 영원한 ‘마음의 고향’ 같은 존재이자,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였으며, ‘스스로 깨우침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스승 같은 존재였다(박근혜, 2000, 99-100쪽 참고). 박근혜는 육영수에게서 퍼스트레이디의 준거도 봤다. 박근혜는 특히 육영수가 보여준 여러 모습 가운데 해외 순방에서 보여준 외교적 역할을 주목했다.
박근혜는 “어머니가 한복을 입음으로써 우리나라가 고유의 전통문화를 가지고 있는 나라임을 보여 주었고, 그곳의 불우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마치 내 나라 국민처럼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한국인의 따뜻한 마음과 정을 보여줬다”고 기억했다(박근혜, 2000, 84쪽 참고). 박근혜는 육영수 사후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게 됐다. 그의 나이 겨우 22세였다. 박근혜는 1979년 10·26 사태까지 5년간 영부인 직무를 대행했다.
<2화 계속...>
비선권력기록팀=김용출·이천종·조병욱·박영준 기자 brightw@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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