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오후 4시30분 부산지법 306호 법정. 행정단독 심리로 새벽근무 직후 조퇴한 뒤 병원 응급실로 후송됐다가 숨진 권영모(부산 남구청 소속 환경미화원·2015년 12월 30일 사망 당시 41세)씨 유족이 근로복지공단 부산지역본부를 상대로 제기한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 결정 처분 취소’ 청구소송 심리가 열리고 있었다.
영모씨의 사망원인에 대해 근로복지공단 측이 정리한 직접사인은 ‘급성 패혈증성 쇼크’였고, 원인은 ‘상세 불명’ 이었다.
2015년 12월 30일 새벽근무 직후 병원으로 이송돼 급성 패혈증성 쇼크로 숨진 부산 남구청 소속 환경미화원 권영모씨의 부친 권태원(72)씨가 지난 8월 23일 부산지법 306법정에서 증언했다. 증언 후 법원 청사 밖에서 인터뷰에 응한 권씨가 감정이 북받치는 듯 눈물을 쏟아내고 있다. 전상후 기자 |
권씨는 증언과정에서 “큰아들 영모가 숨지기 이틀 전에 오른손 손목 부분에 배어나온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며 “어찌된 것이냐고 물어보니 아들이 ‘일을 하다 보면 못이나 깨진 유리병 등에 찔리는 경우가 많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사실이 있다”고 진술했다.
권씨는 “당시 큰아들이 ‘파손된 액자에서 튀어나온 못에 찔린 것 같다’는 말을 했고, 내가 병원에 가보라고 하니 ‘괜찮다. 1회용 반창고 있으면 주세요’해서 줬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증언 말미에 “사고 당일 오전 4시쯤 출근해서 새벽 근무를 한 뒤 청소반장이 아들 얼굴을 보고 너무 창백하니까 ‘퇴근해서 쉬라’고 했는데 자기 아들이라면 그리했겠느냐. 바로 병원으로 데리고 가지 않았겠나. 저는 지금도 일하는 환경미화원들의 옷을 보면 아들이 생각이 나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며 울먹였다.
이어 피고측 변호인의 반대심문이 진행됐다.
반대심문은 “고인 사망 이틀전 증인 사무실에 고인이 가는 것을 본 목격자가 있느냐? 7년여 동안 태권도장을 운영하다 그만둔 경위와 그후 태영에서 근무할 때 일한 업무와 역할이 무엇이었나”며 고인의 환경미화원 입사 전 업무와 사망원인과의 연관성이 있는 지 여부에 대해 간단히 물었다.
이어 재판장인 판사가 “중요한 내용인 고인이 사망 전 못에 찔렸다는 사실을 진작 말하지 않고 지금에야 말하게 된 사유가 무엇니냐”는 요지의 질문을 이어갔다.
이에 권씨는 “큰아들이 죽은 직후 사실 제가 넋을 놓고 있었다. 그 때는 몇개월 동안 생을 마감하려고 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둘째아들이 ‘아버지 우리는 자식이 아닙니까. 왜 이리 넋을 놓고 있습니까’하는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그때 제가 생각해보니 자식을 하나 잃었지만 남은 자식이 둘이 있으니 정신을 차려야하겠다고 마음을 가다듬고 보니 못에 찔렸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고 진술했다.
원고측 변호인도 “(증인이 정신을 차린)그후 증인이 근로복지공단을 찾아가서 나중에 설명을 했는데 따로 (초기)진술서에는 증인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안 돼 기록되지 않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권씨는 법정 증언을 마친 뒤 가진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아들이 급사한 이후 공황상태에 빠졌던 자신의 심리상태와 미흡할 수밖에 없었던 대처과정에 대해 소상히 털어놓았다.
근로복지공단 1차 심사, 재심사 등의 과정에서 있었던 유족에게 사망원인을 떠넘기는 듯한 국가기관의 무성의한 태도, 섭섭했던 부분에 대해서도 가감없이 밝혔다.
권씨는 2015년 12월 30일 오후 2∼3시경 큰며느리(43)로부터 울먹이는 목소리로 걸려온 “남편이 너무 위중해 여기(용호동 성모병원)에서는 안 돼 동아대병원으로 갑니다”라는 전화를 받고 아내와 함께 하던 일을 접고 황급히 동아대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해 상태를 보니 아들 영모씨는 이미 손발 등 사지에 청색증이 심하게 발병,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불과 두어 시간 만인 이날 오후 6시쯤 큰아들을 하늘나라로 보냈다. 공식 사망시각은 오후 6시다.
권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가장 믿고 의지했던 큰아들이 수십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소망하던 환경미화원이 된 지 꼭 한 달 만이었다. 첫월급을 탄 지 며칠도 되지 않았다.
극도의 절망에 빠진 권씨에게 정확한 사망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실시하는 시신에 대한 부검을 권유하는 경찰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식이 일하다 병에 걸려 죽었는데 무슨 부검이 필요합니까. 두 번 죽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라며 애써 거절한 것. 이때 부검을 실시하지 않은 게 훗날 ‘산재가 아니다’는 통보를 받게 될 원인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큰아들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고 삶의 의욕을 잃은 권씨는 매일같이 개인사무실에 출근해 둘째아들과 함께 하던 용달업도 팽개친 채 집안에 틀어박혀 멍하니 앉아있기 일쑤였다.
더욱이 2016년 3월 10일 근로복지공단 부산지역본부장이 보낸 ‘고객이 청구한 유족급여 및 장의비는 부지급 결정을 했다’는 통지서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다둥이 엄마인 착한 며느리가 초·중학교에 다니는 아이 셋을 키울 일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했다.
2016년 4월 중순 어느날 보다 못한 둘째아들(39)이 “아버지! 남아있는 우리는 자식도 아닙니까. 제발 정신 좀 차리십시요”하는 소리를 듣고서야 권씨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권씨는 속으로 ‘그렇지 내가 정신을 차려야지…큰 놈 말고도 남아 있는 자식이 둘이나 있는데…큰아들의 산재가 꼭 인정을 받아야 며느리가 손자손녀 3명을 키우는데 다소라도 부담을 덜 것이 아니겠나’하는데 생각이 미치자 재심을 잘 준비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는 곰곰이 생각을 했다. ‘도대체 무엇이 영모의 사망원인이란 말인가?’.
그렇게 고민을 하는 데 문득 사망 이틀전인 2015년 12월 28일 점심 때 본가에서 식사를 한 큰아들이 인근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로 찾아와 커피를 한 잔 하면서 본 손목에 배어나온 핏자국이 떠올랐다.
그 당시 권씨가 “야야 그게 뭐 꼬”하고 묻자, 큰아들이 “아 새벽에 쓰레기더미를 차에 실으면서 파손된 액자에서 삐져나온 못에 찔린 상처입니다. 피가 좀 많이 나왔네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권씨는 걱정이 돼 “얘야 병원에 가봐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하니, 영모씨는 “아버지 가끔 찔리잖아요. 괜찮아요. 1회용 반창고나 있으면 주세요”라고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권씨는 이후 환경미화원들이 못이나 철사, 깨진 유리병에 찔릴 경우 어떤 병에 걸릴 수 있는 지를 주변의 지인들을 통해 알아본 결과 파상풍에 걸릴 수 있고, 수일 안에 급사할 수 있다는 말도 들었다. 어떤 이는 인터넷에서 자료를 출력해 주기도 했다.
권씨는 심장이 뛰었다. 내가 이런 사실도 모르고 넋을 놓고 있다니.. 장남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사망원인을 규명하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는 ‘파상풍이 급사의 중요원인일 것이다’고 확신했다. 외냐 하면 이 병 말고는 태권도 관장과 사범을 8년 정도 한 그렇게 건강하던 아들이 갑자기 중병에 걸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권씨는 재심의 때 못 찔림과 파상풍에 대해 충분히 진술하기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드디어 산업재해보상재심사위원회가 세종특별시에서 열리는 2016년 5월 20일 오후 2시 일정에 맞추기 위해 권씨는 행여 지각이라도 할까봐 새벽같이 밥을 먹고 부산역으로 달려가 KTX를 이용, 대전을 거쳐 세종시에 일찌감치 도착했다.
오후 2시 이날 재결 대상자 13명 중 12번째로 순서가 잡혔다.
2시간여가 지난 오후 4시를 넘긴 시간에 권씨 순서가 돌아왔다. 위원회를 주관한 부위원장이 “여기 올라온 서류상 내용 말고 특별히 추가할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라고 말했다.
권씨는 “당시 제가 ‘아들 사망 이틀 전에 손목부위에 피가 배어나온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평소 아들은 몸 곳곳이 녹슨 못이나 깨진 유리에 자주 찔린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패혈증 원인이 될 수도 있지않을까…’라고 말하는 순간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부위원장이 말을 가로막고 ‘(못에 찔렸다는)그거는 여기 다 있는 내용입니다. 다른 것 특별한 게 더 없으면 마치십시다’라며 서둘러 심의를 종결하려는 의도를 내비쳤다”고 말했다.
아들 영모의 사망원인을 규명할 재심의는 진술도 제대로 못한 채 그렇게 허망하게 끝났다. 재심의장을 빠져나온 권씨는 결과가 제대로 나올 것 같지 않은 예감에 발걸음이 떼어지질 않아 복도에 한참을 서 있다가 부산으로 향했다.
권씨는 당시의 심경에 대해 “부산에서 새벽밥 먹고 세종시에 가서 또 몇시간을 기다려 겨우 발언 기회를 얻었는데 중도에서 말을 막으니 너무 실망이 컸고, ‘대한민국 법이 뭐 이런 법이 있나’ 싶어 속으로는 화가 났지만 불이익을 당할까봐 말 한마디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았고 시간 때문에 제대로 된 진술을 못했다”고 회상했다.
“심의장을 빠져나왔는데, 이미 답이 나와있구나 생각하니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었다”고 그는 덧붙였다.
부산으로 돌아온 권씨가 며칠 후 산재보상재심사위로부터 송부받은 재결서 정본에는 ‘청구인의 재심사 청구를 기각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재결서를 한동안 멍하니 쳐다보던 권씨는 힘없이 용지를 거실 바닥에 떨구었다.
유족이 받은 불이익은 비단 이뿐이 아니다.
고인은 원래 계약된 근로시간대인 오전 6시∼오후 4시까지인 근로시간보다 1시간 반이나 빠른 오전 4시30분까지 늘 출근한 사실을 부산 남구청이 사실관계 확인을 해줬는데도 근로복지공단은 이를 간과했다.
아침, 점심시간이 물론 있긴 했지만 오전 4시30분 출근과 오전 6시 출근은 피로도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서류상 근로시간보다 초과근무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특히 신참 환경미화원인 영모씨가 근무한 곳은 경성대와 부경대를 끼고 있어 남구 관내에서 가장 번화가인데다 유흥주점 등이 밀집해 있어 깨진 유리 등 쓰레기 물량이 가장 많은 곳이다. 그래서 갓 입사한 신참들이 거쳐야하는 필수코스다.
유족은 남구청의 협조도 받지 못했다.
행정소송을 준비하면서 재판부에 고인 사망 당일의 ‘조퇴를 지시했던 당시 상황’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2인1조로 근무했던 백모 반장의 사실확인서를 받기 위해 고인의 맏딸(당시 중3)은 손으로 직접 쓴 ‘눈물의 탄원서’를 남구청장에게 제출했다.
권영모씨의 맏딸(당시 중3)이 남구청장에게 제출한 수기로 작성한 탄원서. 권씨 유족 제공 |
해당 팀장이 사실확인서 제출을 탐탁지않게 여긴다는 것이다.
구청장도 유족을 불러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고인 맏딸은 탄원서에서 “아빠는 그날 새벽 3시30분에 일을 하러 나가셨는데, 그게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너무 놀라 울기만 하였습니다. 아직도 아빠가 돌아가신 것이 믿어지지가 않습니다”라며 “구청장님 저에게는 7살, 14살 어린 동생이 둘이나 있고, 아버지 없이 저희는 어떻게 살아가야할 지 두렵고 무섭습니다”라고 호소했다.
맏딸은 이어 “아빠는 일터에서 일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산업재해가 아니라고 판정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며 “그렇다면 어떤 것이 산업재해인가요?”하고 되물었다.
맏딸은 끝으로 “구청장님 제발 저희 아빠의 상급자와 동료직원분들에게 말씀하셔서 그날 반장아저씨께서 왜 조퇴를 권고하셨는지와 반장님이 본 아빠의 얼굴표정, 평소 근무지에서의 태도, 건강상태에 대한 확인서를 써주시도록 부탁드립니다. 재판에서 좋은 결과가 나와야 저와 제 동생들도 마음놓고 학교에 다닐 수 있고 어른이 되어 국가와 남구청을 위하여 봉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빠도 마음을 놓으실 것이라 생각됩니다”라고 적고 구청장님 바쁘신 가운데 편지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인사말로 끝을 맺었다.
2016년 8월 7일 수기로 작성된 이 탄원서는 다음날 부산 남구청 민원실을 통해 접수됐다.
부산=전상후 기자 sanghu6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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