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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란 20년-시민에서 답을 찾다] 시민 가치 밀어낸 ‘생존 가치’… 민주·법치주의까지 위협

입력 : 2017-10-22 19:03:54 수정 : 2017-10-22 17:3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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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성’ 확립해야하는 이유
“아무리 좋은 자동차를 만들어놔도 운전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흉기가 될 수 있듯이, 아무리 좋은 민주주의 선거제도와 정당제도를 만들어놔도 정당을 운영하는 사람과 선거제도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제대로 하지 않으면 못하는(소용없는) 것 아닙니까”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을 앞둔 2007년 9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시민적 각성과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한 말이다. 그는 어떤 국가 시스템을 좋게 만들어도 그 시스템을 운용하는 공무원들이 민주화되지 않으면 별 수 없다고도 했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고 성숙한 사회가 되려면 관용의 정신과 타협을 아는 시민들의 연대와 적극적인 참여가 절실하다는 호소였다. 달리 말하면 우리 사회의 부족한 시민성에 아쉬움을 내비친 것이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도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목소리가 높다. 각계 전문가들은 1987년 정치적 민주화 이후 정치·경제·사회 모든 영역에서 시민적 덕목과 역량을 키우는 데 소홀히 한 결과라고 입을 모은다. 특히 20년 전 외환위기를 계기로 신자유주의의 거센 파도에 휩쓸린 우리나라의 경우 튼실한 복지체제와 연대의식 등이 절박했지만 정부와 정치권의 리더십 실패와 함께 각자도생하게 되면서 국민 대다수의 삶이 팍팍해졌다고 진단한다.
지난달 말 세계불꽃축제가 끝난 후 쓰레기장이 되다시피 한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의 모습.

◆무자비한 경쟁 속 시민성지수도 ‘F학점’

“오늘 밤 주인공은 나야 나…. 픽미, 픽미”

여성과 청소년 팬심을 사로잡으며 인기가 하늘을 찌른 남성 11인조 아이돌그룹 ‘워너원’의 대표곡 가사 일부다. 지난 6월 서바이벌(살아 남기)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 시즌 2’를 통해 탄생한 강다니엘 등은 참가자 101명이 벌인 치열한 경쟁을 뚫고 스타의 꿈을 이뤘다. 반면 이들에 밀린 참가자들은 가차없이 오디션 무대에서 사라졌다.

예능 분야 역시 상업성과 상품성 극대화를 위해 앞다퉈 출연자들을 가혹한 경쟁에 내모는 현상은 ‘시장지상주의 정글’이 되어버린 한국 사회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경쟁에서 이기거나 살아남는 자들만 한정된 부와 권력, 명예 등을 거머쥐는 구조의 고착화로 너나없이 경쟁 문화에 익숙해진 탓이다. 스웨덴 린네대학 최연혁 교수(정치학)는 통화에서 “외환위기 이후 (개인적인) 생존 가치가 더 중시된 반면 (사회적인) 시민 가치는 약화된 게 문제”라며 “스웨덴이 유치원 때부터 자기와 의견이 다른 타인의 생각도 존중하도록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것처럼 시민성 교육을 위한 제도 개혁과 정치권의 각성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2년 전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의 세계가치관조사(World Value Survery)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탈물질주의자는 14.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상당수를 포함한 분석 대상 26개국 중 23위에 머물렀다. 또 30개국을 대상으로 분석한 ‘공민성’과 ‘공개성’도 각각 29위(5.23점)와 28위(5.11점)에 그쳤고, ‘공익성’과 ‘공정성’ 역시 모두 30위(각 3.51점, 3.91점)로 바닥이었다.

이처럼 우리 사회가 헌법 1조1항(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의 정신과 거꾸로 가면서 생긴 병폐는 깊었다. ‘부익부 빈익빈’에 따른 양극화를 비롯해 ‘관피아’(관료+마피아) 등 유력 인사와 부유층의 탐욕, ‘님비 현상’ 심화 등 공공·민간 영역 전반에 비인간화와 이기·보신주의가 만연했다. 경희대 이영준 후마니타스칼리지 학장은 “세월호 침몰 사건을 통해 시민성이 빈약한 우리 사회의 온갖 적폐가 압축적으로 드러났다”며 “해경 등 사고 대처에 무능했던 정부도 문제지만 세월호 선장과 승무원들이 시민적 책임의식을 갖고 있었다면 그렇게 직업윤리를 내팽개치진 않았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올바른’ 민주주의, 성숙한 시민들에게 달려

지난해 말 서울 광화문광장을 중심으로 전국을 뜨겁게 달궜던 촛불시위에 전 세계가 놀랐다. 최고 권력자가 헌법상 책무를 방기한 것에 분노한 국민들이 평화적인 시위로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내는 모습에 ‘성숙한 시민의식의 위대한 힘을 한국 국민들이 보여줬다’고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이처럼 ‘큰 불의’를 못 참는 사람들이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는 ‘작은 불의’에 대해선 침묵, 동조하거나 ‘조그만 불이익’조차도 못 참는 경향이 많다는 게 문제로 지적된다. 탄핵 촛불시위를 이끈 안진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국민들이) 사회적인 큰 모순이나 권력의 잘못에 대해 문제 삼고 연대하는 데엔 굉장히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다”며 “다만 그에 걸맞은 시민정신이 일상생활에 깃들지 못해 아쉽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고 말했다.
장애학생 어머니들이 지난달 5일 서울 강서구에서 열린 강서지역 공립 특수학교 신설 2차 주민 토론회에서 지역주민들 앞에 무릎을 꿇고 학교 설립을 호소하고 있는 모습. 주민들은 한방병원 설립을 요구하며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했다. 집단이기주의에서 비롯된 공공·복지시설 반대(님비) 현상은 심각한 지경이다. 서울장애인부모연대 제공

대형 이슈에는 계층과 세대, 이념 차이 등을 떠나 하나가 되는 시민들이 일상으로 돌아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확 달라지는 장면은 낯설지 않다. 특히 아무리 공동체적 가치를 담은 사안이라도 자신과 가족의 이익에 부정적이라고 판단되면 무조건 반대하는 경우도 흔하다. 노인과 장애인 등 사회 취약계층을 위한 복지시설이나 지역사회에 꼭 필요한 공공시설을 지을 때 집값 하락과 자녀교육 환경 훼손 등의 이유를 대며 막무가내로 결사 저지하는 일이 예사다. 최근 서울 강서구에서 발생한 장애아동 특수학교 설립 저지 논란이나 저소득 가정 대학생들의 주거비 부담 경감을 위한 대학 기숙사 건립이 인근 지역 주민들의 항의로 지지부진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돼 재판을 받고 있는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지난 2월 검찰에 출석하는 모습. 그는 명석한 두뇌와 수사능력을 자랑한 검사 출신이지만 공공성보다 출세와 권력에 눈먼 엘리트의 대명사가 됐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법률 위에 헌법, 헌법 위에 국민정서법, 그 위에 떼법’이라는 말이 돌 만큼 법치주의가 올바르게 작동하지 않고 준법정신과 거리가 멀 때도 많다. 심지어 ‘정당한’ 공권력 행사나 사법부의 독립적인 판단마저 자신들의 마음에 안 들면 대놓고 불복하거나 비난을 퍼붓기 일쑤다. 정치권도 예외가 아니다. 예컨대 지난 3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구속영장을 발부해 네티즌의 칭송이 자자했던 서울중앙지법 강부영 영장전담 판사는 석달 후 최순실씨 딸(정유라)의 영장을 기각했다가 개인 신상까지 털리며 온갖 음해에 시달렸다. 
‘갑질 논란’으로 빚은 정우현 미스터피자 회장이 지난 6월 서울 서초구 본사에서 대국민사과를 하고 있는 모습. 그는 가맹점주들에게 시가보다 비싼 치즈를 구입하도록 강요해 50억원가량을 챙긴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됐다.

상대적 약자에 대해 관용과 배려 대신 ‘갑질’과 횡포가 일상화한 지도 오래다.

김윤태 고려대 교수(사회학)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갖지 못하게 하는 세상이다 보니 상호 협력과 유대가 느슨해질 수밖에 없고, 파편화·고립화에 따른 우울증과 자살 증가 등 사회병리현상도 심각해졌다”며 “다만 이럴수록 시민성과 공공성 가치를 중요시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장덕진 서울대 교수(사회학)는 “국민들이 시민성을 잘 발휘할 수 있게 하려면 정치제도 등이 정비되고 (국가 공동체 발전을 위해) 최소한 합의된 가치부터 마련돼야 한다”며 “그러나 우리 사회는 (나라의 근간인) 헌법과 그 정신마저 정치권은 물론 대부분 잘 모르거나 신경 안 쓴다. 헌법이든 뭐든 충분히 합의된 가치를 찾는 게 시민성 강화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특별기획취재팀=이강은·최형창·김라윤 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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