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항소심 법원 중 최대 규모인 서울고법에서 요즘 들려오는 푸념이다. 지난달 31일 댓글 여론조작 사건으로 기소된 김경수 경남지사가 서울중앙지법 1심에서 징역 2년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된 데 따른 것이다. 김 지사 측이 즉각 항소함에 따라 ‘공’은 조만간 서울고법으로 넘어간다.
5일 현재 서울고법에는 판사 3명으로 구성된 형사합의부가 14곳 있다. 김 지사 사건 항소심은 무작위 전자추첨을 거쳐 이 14개 재판부 가운데 어느 한 곳에 배당될 전망이다.
서울고법 법관들은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다들 김 지사 항소심만큼은 ‘부담스럽다’는 기색이 뚜렷하다. 요즘 항소심 재판은 1심 재판 과정이나 결론에 특별히 하자가 없으면 그냥 1심 결론 그대로 하자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하급심 재판 결과가 존중을 받고 상급법원에 대한 불필요한 상소 남발을 억제하는 풍토 조성을 위해서다.
그렇다고 항소심이 ‘드루킹’ 김동원씨와 김 지사의 공모관계를 100% 인정한 1심을 그대로 인용한다면? 당장 1심 선고 직후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들고나온 법관 탄핵 카드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1심 재판장 성창호 부장판사가 양승태(구속) 전 대법원장의 비서 출신이란 점을 들어 적폐로 단정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무릅써가며 “적폐판사들을 탄핵하겠다”고 을러대지 않았던가. 1심과 결론을 같이했다가는 여당 의원들로부터 덩달아 ‘적폐판사’로 찍혀 법관 인생이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다.
1심을 깨고 김 지사를 석방한다면 어떨까. 여당인 민주당으로부터는 칭찬을 들을 지 몰라도 자유한국당, 바른미래당 등 야당들의 거센 비판을 감내해야 한다. 야당들은 김 지사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그를 법정구속한 1심 선고가 내려진 직후 일제히 “사법부가 살아 있다. 올바른 판결을 했다”는 반응을 내놓았다.
그랬는데 항소심에서 뒤집힌다면? 야당들은 해당 서울고법 재판부가 문재인정권을 의식해 ‘봐주기’ 판결을 했다고 십자포화를 쏘아댈 것이 뻔하다. “문재인정권의 폭압 앞에 사법정의가 죽었다”는 내용이 논평이 신문지상을 뒤덮을 것이다. 앞서 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사법부가 자신의 권위와 독립을 (문재인) 정권의 발밑에 바치려 한다면 탄핵해야 할 대상은 김명수 대법원장”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요즘 법원은 인사철이다. 서울고법에 있다가 다른 법원으로 옮기는 이도 있고 다른 법원에서 서울고법으로 새롭게 전입하는 이도 있다. 자연히 민사부와 형사부, 행정·가사사건을 다루는 특별부 모두 인적 개편이 불가피하다. 판사의 보직 결정을 뜻하는 ‘사무분담’이 곧 이뤄질 예정이다.
김 지사 항소심이 어느 재판부에 배당될 지 알 수 없으나 벌써부터 미간을 찌푸리며 아예 형사부 배치 자체를 꺼려하는 법관들한테는 이런 속사정이 있다. 속된 말로 ‘어떤 판결을 내리는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고약한 사건’인 셈이다.
사실 김 지사 항소심만이 아니다. 문재인정부 출범과 거의 동시에 검찰의 적폐청산 수사가 시작되며 서울고법는 형사부 기피 풍조가 만연하기 시작했다. 수도권 법원에 근무하는 한 부장판사는 “2017년 문재인정부 출범, 그리고 적폐청산 수사 개시를 계기로 서울고법에서 형사부 근무를 가급적 하지 않으려는 법관이 늘었다”며 “김 지사 사건은 적폐청산 사건과는 직접 관계가 없지만 정치적 성격은 그보다 훨씬 더 강해 평범한 판사라면 다들 피하고 싶어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지사 항소심 같은 사건을 피하기 위해 이번 법관 정기인사에 앞서 서울고법 형사부 법관들 가운데 신설 예정인 수원고법 전보를 희망한 이가 무척 많았다고 한다. 한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세상에 어느 법관이 전·현 정권 실세가 연루된 사건 재판을 맡고 싶어하겠느냐”며 “계속 서울고법에 있다가는 필경 그런 사건 항소심을 하게 될 터이니 그 전에 수원고법으로 ‘피신’하려는 판사가 제법 있었다는 얘길 들었다”고 귀띔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