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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물 무단 파기해도 ‘처벌’은 없다 [알권리는 우리의 삶이다]

입력 : 2019-04-29 06:03:00 수정 : 2019-04-29 07: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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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반복되는 기록물 무단 파기 / 수사기관·법원 ‘공식 결재’ 기준 삼아 / 국가기록원은 “모든 공적 기록 해당” / 水公, 4대강 문건 등 16t분량 문건 파기 / “혐의 적용 다툼 소지”… 수사 흐지부지 / 기록 사라지면 국민 알권리에 치명적 / “국가기록원 감사 권한 확대” 목소리

#1. 2016년 10월 이철성 당시 경찰청장은 국회 국정감사에서 농민 백남기씨가 경찰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2015년의 민중총궐기 당일 상황 보고서에 대해 “이미 파기해 없다”고 밝혔다. 시민단체가 “경찰의 책임 여부를 가릴 중요 공공기록물을 무단 파기했다”며 이 청장 등을 고발했으나 검찰은 ‘무혐의’로 종결했다. 담당 검사는 고발인을 불러다놓고 “그럼 여기(사무실)에 있는 문서 모두 공공기록물이냐”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2. 지난해 10월 인천시는 공공기록물을 무더기로 내다버렸다는 의혹과 관련해 행정안전부 산하 국가기록원의 특별점검을 받았다. 점검 결과 주민등록번호 등 개인 신상정보가 담긴 원본 기록물 다수가 법에 정해진 심의 절차도 안 거치고 버려진 사실이 확인됐다. 그럼에도 징계는 한 건도 없었다. 인천시는 “(공교롭게도) 쓰레기장 근처에 폐쇄회로(CC)TV가 없어 누가 기록물을 버렸는지 특정할 수 없다”고 이유를 밝혔다.

 

‘기록물을 무단 파기한 자는 7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원(현재는 3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 김대중정부 시절인 1999년 국회가 공공기록물 관리법을 만들 때 가장 공들인 부분이 바로 형사처벌 조항이다. 기록물 관리의 엄중함을 일깨우고 주먹구구식 파기를 막으려면 ‘일벌백계’가 필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초 취지와 달리 이 조항으로 처벌된 사례는 거의 없다. 28일 세계일보 취재팀이 언론 보도와 국정감사 자료, 국가기록원 문건 등을 토대로 최근 10여년 동안 발생한 공공기관의 기록물 무단파기 40여건에 대한 후속조치를 점검한 결과 대부분 경징계나 주의 선에서 마무리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경향이 기록물 무단파기의 반복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 지적이다.

 

◆처벌 조항은 ‘있으나 마나’

 

취재팀이 대법원을 통해 확인한 결과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10년간 공공기록물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사건은 7건에 불과했다. 그나마 대부분 기소유예나 무죄 선고가 났다. 2014년 2건만 벌금형에 처해졌는데, 기록물 ‘파기’가 아닌 ‘유출’ 사유였다. 그간 공공기록물법 위반 사례가 언론에 여러 차례 보도된 점을 감안하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대목이다.

 

실제로 무단 파기 처벌 조항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2017년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당시 불거진 ‘면세점 선정 비리’ 의혹이 대표적이다. 감사원 감사에서 2016년 6∼10월 천홍욱 당시 관세청장을 중심으로 면세점 심사 관련 자료를 조직적으로 없앤 정황이 드러났다. 감사원에 따르면 천 전 청장은 국회로부터 면세점 업체의 사업계획서 등 제출을 요구받자 “(고발당할 수 있으니) 아예 보유하지 않았던 것으로 하자”며 반환을 지시했고, 탈락 업체 사업계획서는 폐기됐다. “국회가 요구해도 제출하지 않는 게 좋겠다”, “보관하고 있으면 국회법에 따라 제출해야 한다”는 등의 보고를 받고 나서다.

 

감사원은 “자료 파기로 면세점 사업자 선정이 투명하게 이뤄졌는지 확인할 수 없게 됐다”며 공공기록물법 위반 혐의로 천 전 청장을 검찰에 고발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지난해 7월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무혐의’ 종결됐다. 기록물 파기에 연루된 공무원 2명도 견책, 경고 등 경징계를 받는 데 그쳤다. 결국 아무도 제대로 책임을 지지 않은 셈이다.

 

지난해 1월 한국수자원공사는 폐지업체를 통해 16t 분량 기록물을 무단 파기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일었다. 쓰레기더미 속에서 302건의 원본 기록물이 발견됐으며, 거기엔 4대강 관련 문건도 40건이나 포함돼 있었다. 국토교통부는 “무관용 원칙을 적용하겠다”며 이학수 수자원공사 사장을 고발 조치했다.

 

하지만 수사는 지지부진해 검찰 송치는커녕 이 사장이 참고인 조사만 한 번 받은 게 전부다. 경찰 관계자는 “검찰에 송치하려 했으나 ‘보완수사’ 지휘가 내려왔다”며 “혐의 적용에 다툼이 있다고 본 듯하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사회적 파장이 컸던 감사원의 한국농어촌공사 쌀직불금 부정수급 의심자 명단 폐기(2008), 대전지법의 재판기록 1500쪽 파기 의혹(2009), 경찰청의 교육감 후보자 성향 조사 기록 폐기(2011) 등 사건도 아무 처벌이 없었다. 취재팀이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입수한 국가기록원의 ‘공공기록물 무단 파기 인지 내역’에 오른 34건도 대부분 ‘주의·훈계 요구’나 ‘시정 요청’ 선에서 마무리된 것으로 확인됐다.

 

◆협소한 정의·온정주의의 작용

 

왜 처벌 조항이 작동되지 않는 걸까. 이유는 여러 가지로 분석된다. 우선 수사기관이 공공기록물 범위를 협소하게 해석하는 점이 주된 원인으로 꼽힌다. 국가기록원이나 시민단체는 법에 명시된 것처럼 ‘공무원이 업무와 관련해 만든 모든 형태의 기록정보’를 공공기록물로 봐야 한다고 여기지만, 수사기관이나 법원은 공식적인 결재나 시스템 등록 등 절차가 전제돼야만 공공기록물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관련 수사 경험이 있는 한 검찰 관계자는 “공무원이 공공기록물을 무단 파기했다면 당연히 처벌을 받는다”면서도 “공공기록물 사건의 경우 그 범위에 있어 법리적으로 다툼의 소지가 있는 게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2010년 12월 검찰이 상지대 옛 재단 이사장 복귀 관련 속기록 무단파기 사건을 ‘각하’ 처분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속기록은 법리상 공공기록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지난해 12월 청와대에서 김태우 전 민정수석실 특별감찰반원이 작성한 첩보보고서를 파기한 사건과 관련해 ‘공공기록물 무단 파기’란 주장과 ‘첩보보고서는 공문서가 아니다’란 주장이 맞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수사 경험이 풍부한 경찰의 한 관계자는 “(무단 파기는) 외부에서 알아차리기 힘든 범죄 유형”이라며 “수사 경험이 있는 사람도 드물고 기소도 잘 안 돼 참고할 선례가 딱히 없는 상황”이라고 귀띔했다.

 

무단 파기로 적발되더라도 기관들이 해당 공무원의 해명을 받아들여 눈감아주는 일도 적지 않다. ‘고의가 아니라는데 굳이 형사처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는 일종의 온정주의가 작용하는 것이다. 전진한 알권리연구소장은 “여태껏 기록물 무단 파기로 기소되는 일이 거의 없었던 건 수사 주체와 대상이 둘 다 공무원이란 점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며 “관행이라거나 실수였다고 하면 대체로 넘어가주는 분위기로 보이는데, 기록관리 측면에서 상당한 문제”라고 꼬집었다.

 

이창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가에서 녹을 받는 공무원이 업무에 활용하고자 만든 자료라면 (등록되지 않았더라도) 공공기록물로 볼 수 있다”며 “기록물이 파기되면 투명성 확보나 권력 감시는 물론 후대의 역사적 평가도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1월 국가기록원 관계자들이 ‘4대강 자료 파기 의혹’이 불거진 한국수자원공사 대전 본사를 찾아가 폐기 문서를 회수하고 있다. 조사 결과 300여건의 원본 기록물이 별다른 절차나 심의 없이 버려진 것으로 드러났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국가기록원 권한부터 넓혀야”

 

전문가들은 과거 잘못을 감출 목적에서 기록물을 없앤 사례가 많았다는 점을 들어 정부가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법 취지에 맞춰 형사사법당국이 기록물 무단 파기 사건을 더 엄정하게 다뤄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승휘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원에서 한두 번 중형이 나오면 공무원들이 기록물을 무단 파기하는 사례가 많겠느냐”며 “철저한 기록관리 문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국가기록원을 중심으로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일각에서는 공공기록을 총괄하는 국가기록원의 감사 권한을 보다 넓혀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현재는 국가기록원이 언론 보도나 감사원 감사 등을 계기로 기관들의 무단 파기 사례를 비로소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물밑에서 얼마나 많은 무단 파기가 벌어지고 있는지 파악이 힘든 구조란 얘기다. 한 정부 관계자는 “미국은 우리와 달리 국가기록관리청장에게 (감사와 관련한) 충분한 권한을 법적으로 부여하고 있다”며 “국가기록원이 매년 실태를 평가하고는 있으나 뚜렷한 법적 근거가 없는 데다 행안부 산하기관이란 낮은 위상 때문에 정확한 실태를 파악하긴 역부족”이라고 말했다.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조민지 사무국장은 “기록이 사라지면 정보공개 청구도 불가능해진다는 점에서 무단 파기는 국민 알권리에 치명적”이라며 “정부 차원에서 의지를 갖고 꾸준히 관심을 가져야만 근절될 수 있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 전자문서 시대… 복원 불가능한 ‘디가우징’ 논란

 

공공기관들이 업무를 전자문서로 처리하는 사례가 늘면서 이른바 ‘디가우징’(Degaussing)을 통한 기록물 삭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디가우징은 ‘디가우저’란 장치를 이용해 강력한 자력으로 컴퓨터 하드디스크 정보를 파기, 복구가 불가능하게 만드는 기술을 뜻한다.

 

지난해 6월 법원행정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재직 당시 쓴 컴퓨터 하드디스크가 2017년 10월 디가우징 처리됐다고 밝혔다. 법원 측은 “대법관급 이상 간부가 사용한 컴퓨터는 직무 특성상 임의로 재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퇴임 시 폐기가 원칙”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양 전 대법원장 시절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제기된 상황에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디가우징 시점이 마침 일선 판사들의 의혹 제기에 따른 2차 조사를 목전에 둔 때였다는 점도 의구심을 키웠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곧장 논평을 내고 “대법원 ‘전산장비운영관리지침’ 어디에도 대법관 이상이 사용하던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완전히 소거 조치해야 한다는 명확한 규정은 없다”며 “대법원이 내부 지침에 따라 하드디스크를 소거했더라도 하드디스크 안에 저장된 전자문서 등 기록물을 무단으로 파기한 행위는 공공기록물법 위반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검찰 수사에 대비해 법원 스스로 불리할 수 있는 자료를 복구 불능으로 만든 것이란 의심이 담겨 있다.

 

디가우징은 2008년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의혹이 불거졌을 때 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 직원들이 증거인멸에 활용하며 널리 알려졌다. 2013년 국가정보원 정치 댓글 의혹 사건에서도 경찰 수뇌부가 검찰의 압수수색 직전 관용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디가우징해 논란이 됐다. 주로 기관들이 자기네한테 불리한 정보를 감추는 용도로 쓴 셈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전자정부법 또는 공공기록물법 위반 소지가 크다고 지적한다. 반면 법조계는 해당 하드디스크에 어떤 기록이 남아 있는지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단순히 ‘복구 불가능화’ 작업을 한 것만 갖고 처벌하긴 어렵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특별기획취재팀=김태훈·김민순·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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