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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강성대국 고구려’ 어떻게 출현했나…북한 고고학의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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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9-21 11:04:42 수정 : 2019-09-21 11: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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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고고학계에 따르면 세계문명의 발상지는 5곳이다. 나일강을 기반으로 한 이집트 문명,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갠지스강의 인도 문명, 황하의 중국 문명은 일반적인 인식과 다르지 않다. 북한 학계는 여기에 대동강 문화권을 추가한다. 대동강을 기반으로 한 ‘위대한 고조선’이 세계 4대 문명에 비견할 만한 찬란한 고대 문명을 일궜다는 것이다. 고조선의 중심에는 물론 지금 북한의 수도인 평양이 있다. 이런 인식은 1993년 이른바 ‘단군릉’ 발굴 이후 북한 학계를 주름잡고 있는 ‘대동강문화론’의 산물이다. 그러나 대동강문화론이 엄격한 학문적 연구의 결실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강하다. 대동강문화론이 제기된 이후 북한 학계는 “짜여진 각본대로 움직이는 경향”이 뚜렷하다. 역사연구는 “조선민족의 긍지와 조선혁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도록 심화될 것”을 요구받았다. 이에 따라 이전에 확립된 이론은 뒤집혔고, 새로운 체계가 세워졌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지난 19일 개최한 학술대회 ‘분단 70년 북한 고고학의 현주소’에서 진단한 북한 학계의 현실은 정치, 사상이 학문을 압도하는 것이다. 

 

단군릉.

이날 발표된 논문 ‘북한 학계의 고조선 및 낙랑 고고학 연구동향’(박장호 영남대 문화인류학과)에 따르면 1960년대 정점을 찍은 북한의 고조선 연구는 단군릉 발굴을 기점으로 큰 인식의 변화를 보였다. 주요한 논점 중 하나인 고조선 위치문제는 1960년대 ‘요동중심설’이 자리를 잡아 1990년대 초중반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단군릉 발굴 이후 요동설은 폐기되고 고조선의 중심은 평양으로 바뀌었다. 고조선 관련 연구를 평양설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들로 채워졌다. 논문은 “고조선 평양설을 입증하기 위해 평양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가 대대적으로 진행됐다”며 “성천군 룡산리의 석관묘가 요동반도의 강상묘에 비견되며, 평양 일대의 고인돌은 고조선의 노예소유자 및 왕들의 집중거주지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었다”고 밝혔다. 

 

평양설이 제기되면서 고조선은 이전보다 훨씬 유구한(?) 역사를 가진 국가로 자리매김한다. “기원전 1000년기 전반에 성립되었다고 하는 주장에서 기원전 3000년 이전에 평양에서 건국되었다는 논리가 세워진 것”이다. 고조선의 기원을 훨씬 과거로 돌려놓다보니 청동기 시대의 기점, 삼국의 건국연대도 상향됐다. 논문은 그러나 “연대가 조정된 것일 뿐 유적, 유물의 형식변화는 대동강문화론 주장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고구려는 대동강문화론의 관점에 따라 ‘천년 강성대국’으로 자리매김했다. 논문 ‘북한의 고구려, 발해 고고학 연구의 성과와 과제’(강현숙 동국대 경주캠퍼스 고고미술사학과)는 “(대동강문화론의) 연장선상에서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기원전 277년으로 소급하여 천년 강국의 고구려 역사를 평양 중심으로 재구성하였다”고 분석했다. 

 

북한 학계는 고조선 연구에서 단군릉을 결정적 지렛대로 삼았던 것과 비슷하게 고구려 연구에서도 고분을 활용하는 데 주력했다.

 

동명왕릉에 세워진 제당

일찍부터 관심이 컸던 게 고구려 시조인 동명왕의 능이다. 김일성은 1958년 교시에서 관심을 촉구했고, 1974년 1월에는 “고구려가 수도를 옮길 때 고주몽의 무덤도 평양으로 옮겨왔을 것이므로, 동명왕릉을 확증하기 위한 구체적인 연구방법을 제시하라”고 김일성종합대학에 지시했다. 동명왕릉은 진파리10호분으로 비정되었던 것인데 대대적인 정비가 진행된 것이 1993년 즈음이었다. 논문은 “고구려가 고조선을 계승한 자주적인 존엄 높은 국가임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며 “그러나 2003년 고구려 고분이 세계유산 등재 시 진정성에 대한 지적을 받기도 했다”고 밝혔다.  

 

안악3호분의 벽화

‘안악3호분’을 두고도 ‘주체적 역사해석’의 잣대가 적용됐다. 이 무덤에서는 ‘동수’(冬壽)라는 이름이 적힌 명문(銘文·돌이나 금속에 새긴 글자)이 확인돼 북한 학계는 1949년 조사 당시 중국에서 건너온 동수라는 인물이 묻힌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민족적 허무주의와 복고주의에 대한 비판을 받았고”, “큰 규모, (고분 안에 그려진) 대규모 행렬도 등을 근거로 왕릉으로 보는 견해”가 제시됐다. 이에 따라 무덤의 주인은 미천왕으로 비정되었고, 현재는 고국원왕릉이라는 게 정설이 되어 있다. 고국원왕릉임을 주장하기 위해 북한 학계는 안악3호분의 명문을 “낙서 수준의 사료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평가절하하기도 했다.  

 

논문은 “북한은 평양을 중심으로 고조선-고구려-발해-고려로 이어지는 주체적 역사관으로 유적, 유물을 평가한다”며 “이러한 역사인식은 유적과 유물의 조사와 해석에 연동되어서 보고된 유적, 유물을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게 한다”고 평가했다. 

 

강구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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