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청소년 16명 등 피해 여성들에게 대통령으로서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잔혹한 아동성범죄가 자행된 ‘n번방’ 사건으로 국민여론이 들끓자 지난달 청와대가 내놓은 답변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가담자 전원 조사와 엄벌’을 언급하자 경찰은 부랴부랴 철저 수사를 다짐했고, 검찰은 “무기징역”까지 거론하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n번방과 조주빈(25·구속기소)을 키워낸 그들, 그러니까 가상화폐를 이용해 비뚤어진 성욕구를 분출한 가담자들에 대한 처벌은 아무래도 국민 염원과 다르게 흘러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검찰이 아무리 높은 형량을 구형하더라도 선고를 내리는 것은 결국 법원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아동성착취물 커뮤니티였던 ‘웰컴 투 비디오(W2V)’ 회원 판결에서 드러난 법원의 성인지 감수성 부족 현상은 n번방 가담자들에게 그대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W2V를 운영한 손정우(24)가 벌써 ‘죗값’을 다 치르고 27일 출소한다는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현재 우리의 사법체계가 얼마나 허술한지 단적으로 알 수 있다.
◆W2V 검거자, 솜방망이·고무줄 판결만
19일 세계일보 취재팀이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실과 함께 W2V 회원들의 사법처리 결과를 추적한 결과, 경찰에 검거돼 법원 선고까지 이어진 것은 운영자 손씨를 포함해 43명뿐인 것으로 파악됐다. 전국 경찰이 범죄 혐의를 확인하고 ‘기소의견’을 달아 검찰에 송치한 것이 217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불과 5분의 1만 처벌받은 셈이다.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이 ‘사안이 경미해 재판까지 넘길 것은 아니다’라고 판단해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거나, 디지털 범죄 특성상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불기소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직접 기소해야 하는 검찰의 판단은 경찰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애초 이 사건 검거자들이 W2V에 가상화폐를 송금한 사실을 토대로 특정됐다는 점에서 다소 납득이 어려운 결과란 지적이 나온다.
이마저 판결은 ‘솜방망이’ 일색이었다. 취재팀이 입수한 1심 판결문 42건을 보면, 징역형이 내려진 경우는 단 1건도 없었다. 현재 복역 중인 손씨도 1심에선 집행유예가 선고됐다가 지난해 5월 항소심에서 1년6개월의 실형이 선고됐다. 벌금형이 34건으로 가장 많았고, 집행유예가 7건, 선고유예가 1건이었다. 이들에게 내려진 벌금액 평균은 305만8000원으로, 법정형 1000만원에 한참 못 미쳤다.
수사기관 추적을 피하려 다크웹과 암호화폐 등 고도화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아동성범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법원이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W2V의 경우 전 세계 32개국 수사기관의 공조수사 끝에 가까스로 잡아낸 것이었으나 재판부의 고려 대상이 되진 못했다.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이 따로 없는 탓에 형량은 ‘고무줄’이나 다름없었다. 2018년 10월 원주지원은 W2V를 통해 아동성착취물 17건을 소지한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5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반면 한 달 뒤 33건 소지 혐의로 기소된 B씨에게는 선고유예(영월지원)가 내려졌다.
아동성착취물을 3813건 소지한 혐의로 기소된 C씨(전주지법)에게는 벌금 300만원이, 각각 437건, 1080건을 소지한 D씨와 E시(부천지원)에겐 동일하게 징역 4월에 집행유예가 선고되는 등 대중이 없었다. 212건 소지로 300만원을 선고받은 경우(청주지법)도, 165건 소지로 벌금 1000만원을 선고받은 경우(부천지원)도 있었다. 같은 법원(서울남부지법)에서도 45건 소지 벌금 200만원, 94건 소지 벌금 200만원 등 차이를 보였다.
아동기관 취업제한 명령도 단 10명뿐이었다. 손씨도 항소심에 가서야 비로소 취업제한 명령이 추가됐다. 이 사건 검거자가 235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전체의 4.2% 수준이다. n번방을 운영하면서 보육원을 기웃거린 조주빈이 그랬듯 ‘그들’이 지금도 얼마든지 아이들 곁에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판결문엔 기계적인 감형요소만
‘죄질이 대단히 불량하지만 초범이고 자백, 반성했으므로 감형한다.’
W2V 판결문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감형 논리다. 피의자 측 주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인 것인데, 전문가들은 ‘기계적인 태도’라고 지적했다. 국제수사를 통한 가상화폐 송금 사실과 압수수색으로 증거물이 확보된 상황에서 받는 자백과 반성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거다. 법무법인 온세상 김재련 변호사는 “피의자들이 자발적으로 신고해 검거된 것도 아닌데 자백과 반성 등 이유로 감형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판결문에는 양형 기준 때문에 고민하는 판사들의 현실적인 고충도 일부 드러난다. 양형기준이 따로 없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높은 형량을 선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구지법의 한 판사는 “피고인의 범행 기간이 길고 내려받은 음란물이 매우 많으며 적지 않은 비트코인을 지불한 점을 고려할 때 변태적인 성적취향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고 언급했으나 형사처벌 전력이 없는 점을 들어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부천지원 한 판사는 “매우 어린 아동이 등장하는 음란물로 그 음란의 정도가 특히 심각하며 한순간의 실수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유사사건 피고인들에 대한 양형과의 형평성’ 등을 들어 벌금형을 내렸다.
◆“현실적인 대책 고민할 때”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비판이 거세지자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오는 6∼7월 공개를 목표로 디지털성범죄 양형기준을 만들고 있다. 일각에서는 양형기준 신설로 이제 ‘그들’에 대한 온당한 처벌이 가능해지리라 보지만, “국민 법감정과 거리가 먼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과거 양형위원을 역임한 한 법조계 인사는 취재팀과 만나 “양형기준은 최근 수년간 내려진 선고 형량의 ‘평균값’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며 “양형위 자체가 대단히 보수적이어서 국민 기대처럼 파격적인 안이 나오긴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양형기준이 답이 될 수 없다”는 거다.
실제로 지난달 대법원 젠더법연구회 판사 13명은 법원 내부망을 통해 “이대로 양형기준이 마련된다면 피해자는 물론 일반 국민도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다”며 법원이 지금 만들고 있는 양형기준의 전면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앞서 양형위가 양형범위에 참고하기 위해 판사들에게 돌린 설문에 제시된 양형 범위가 법정형에 비해 지나치게 낮게 설정돼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판사들은 “성 착취에 있어 승낙이나 계약이 가능하다고 보는 시각은 노예제에서나 용인될 법한 시각”이라고 꼬집었다.
법조계 내부에서도 시각이 엇갈리는 만큼 양형기준이 나오더라도 상당한 논란이 예상된다.
최근 양형기준 신설과 관련한 국민 2만여명의 의견을 모아 대법원에 전달한 김영미 변호사는 “국민들이 느끼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의 심각성은 상상 이상으로 높았다”며 “지금처럼 전적으로 판사 재량에 맡겨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범죄 피해를 감안한 합리적인 양형기준 수립과 법 체계 정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아동음란물 시청·범행 상관관계 매우 높아”
“잔혹한 아동성범죄를 저지른 조두순, 김수철은 범행 직전 아동성착취물을 다수 시청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아동성착취물 시청과 범행의 인과관계까지 밝혀지진 않았으나 대단히 높은 수준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2012년 법무부 의뢰로 ‘아동음란물과 성범죄의 상관관계 연구’를 수행한 윤정숙 한국형사정책연구원 국제협력실장의 말이다. 그는사회의 무관심 속에서 아동성착취물 분야가 범죄자들에게 ‘탐나는 시장’이 돼 버렸다고 설명했다.
“20대 초·중반인 손정우, 조주빈이 불과 몇 년 새 벌어들인 돈이 수억, 수십억원이라고 하죠. 그 나이에 어디 가서 그런 돈을 벌 수 있을까요. 이번을 계기로 새롭게 이 범죄에 손을 대려는 사람들이 늘어날 거예요. 재범가능성도 높죠.”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특히 아이들에게 치명적이다. 과거 은밀하게 이뤄졌던 범죄 커뮤니케이션이 다크웹·텔레그램 등을 바탕으로 사실상 양지화됐고, 이로 인한 정보공유와 죄의식 희석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어서다. 윤 실장은 “과거에는 아동성착취물이 있다 해도 다른 구매자를 찾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했지만 이제는 손쉽게 수요자를 찾을 수 있다”며 “수요와 공급이 서로 맞물리면서 거대한 ‘시장’이 만들어져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조주빈은 경찰 수사망이 좁혀듦에도 회원들에게 “절대 걸릴 일 없다”고 호언장담했다. 물론 검거되긴 했으나 이는 그가 ‘무엇’인가를 학습한 결과일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수사망을 피하는 수법은 더욱 교묘해질 전망이다. ‘일벌 백계’와 대책 마련이 더 늦어져선 안 된다는 얘기다.
윤 실장은 “집행유예나 벌금형만 선고하는 법원의 태도는 우리 사회가 이 사안을 어떻게 여기는지 드러내고 있다”며 “적어도 아동성착취 범죄만큼은 초범이나 반성, 자백 등 이유로 감형하는 일이 최소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김선영·이창수·박지원 기자, 박혜원 인턴기자 winterock@segye.com
이렇게 취재했습니다
세계일보 취재팀은 ‘웰컴 투 비디오(W2V)’ 국내 검거자의 사법처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수사기관과 법원을 취재했다. 더불어민주당 남인순 의원의 도움을 받아 경찰청으로부터 ‘W2V 사건 이용자에 대한 각 지방검찰청별 송치현황’을 입수, 전체 송치자 235명 중 217명이 기소의견 송치된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개별 사건 기소현황을 알려주기 어렵다”는 검찰 측 입장에 따라 법원도서관 판결정보특별열람실을 이용해 판결문에 접근했다. 우선 이미 공개된 운영자 손정우 등 W2V 검거자 3명의 판결문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키워드를 바탕으로 1차 판결문 검색 작업을 벌여 거의 대부분 판결문에 기재된 W2V 접속 인터넷주소(URL)와 일부 판결문에 나오는 오탈자가 담긴 URL 주소 등 키워드 20여개를 추렸다. 이후 혐의와 기간, 키워드 리스트를 바탕으로 2차 판결문 검색을 벌여 총 43건의 1심 판결문과 1건의 2심 판결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취재팀은 이 중 공개가 제한된 1건을 제외한 43건의 판결문을 사건번호를 근거로 의원실을 통해 대법원으로부터 입수했다. 여러 차례 확인 작업을 거쳤으나 일부 판결문은 검색 과정에서 누락됐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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