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전염병이 창궐하여 크게 곤욕을 치른 시기가 많았다. 15세기에는 뇌수막염으로 추정되는 전염병인 악병(惡病)이 유행하였고, 16세기에는 장티푸스나 발진티푸스에 해당하는 온역(溫疫)이 전국에 유행했다. 조선후기에는 천연두가 유행하여 왕인 숙종이 천연두에 걸렸고, 왕비 인경왕후는 천연두로 사망했다.

19세기에는 콜레라가 유행했는데, 콜레라의 한자음과 유사한 ‘호열자(虎裂刺)’라 하였다. 그 의미도 ‘호랑이에게 몸을 찢기고 잘리는 병’이었으니,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전염병이 유행하면 가장 바빠지는 기관이 의료기관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왕실 의료기관인 내의원(內醫院)을 비롯하여, 관리들의 치료와 약재 공급을 담당한 전의감(典醫監), 일반 백성들을 치료하는 혜민서(惠民署), 그리고 혜민서와 함께 빈민 구제를 담당하다가, 전염병이 유행하면 환자들을 격리하는 시설로 사용한 활인서(活人署)가 있었다. 활인서는 동소문과 서소문 밖에 설치하여 도성 내의 전염병 전파를 막았다. 이외에도 백성을 치료하는 기관으로 조선초기에 설치한 기관이 제생원(濟生院)이다. 제생원은 세조 때 혜민서에 통합되었지만, 지금도 서울 북촌의 계동(桂洞)이라는 이름으로 기억이 되고 있다. 제생원이 현재의 현대사옥 근처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제생동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계생동으로 바뀌었다가 ‘계생’이라는 어감이 ‘기생’과 비슷하다고 하여 다시 계동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내의원은 약방(藥房)이라고도 했는데 궁궐 안에 두었다. 조선후기 창덕궁과 창경궁의 모습을 그린 동궐도(東闕圖)에는 인정전 서편 행각에 내의원이 표시되어 있다. 원래 세자의 거처였던 창덕궁 성정각(誠正閣)은 일제 강점 시기에 내의원으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내의원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에는, ‘보호성궁(保護聖躬) 조화어약(造化御藥)’이라는, ‘왕의 몸을 보호하고 왕의 약을 잘 만든다’는 뜻을 담은 영조의 어필 현판이 걸려 있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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