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는 멈췄어도 추억은 영원하리/영화 ‘건축학 개론’ 첫 사랑 담긴 촬영지/‘80살 구둔역’ 옛 대합실 흔적 고스란히/그림엽서 같은 ‘식물원 카페’ 눈도 마음도 힐링/용문사 ‘천년 은행나무’ 노란 소원지 주렁주렁/능내역 철길 은은한 야경 레트로 여행 완성
시골 간이역. 누군가에게는 첫사랑의 그리움과 진하게 맞닿아 있다. 수줍게 두 손을 맞잡고 방금 기차가 지나간 철길을 걷던 아련한 기억들. 어떤 이에게는 어머니가 챙겨주신 따뜻한 도시락을 품고 졸린 눈을 비비며 몸을 싣던 통학기차나 통근열차의 추억이다. 입영열차에 올라탄 청춘은 안 그래도 느린 완행열차가 조금이라도 더 천천히 갔으면 하고 바랐겠지. 오랜 세월이 흘러 이제 간이역에는 기차가 서지 않는다. 철길은 녹슬고 빛바랜 역사 간판의 글자는 뜯겨 나갔다. 그래도 다행이다. 철거되지 않고 남아서 기차를 타고 내린 수많은 이들의 추억을 전하니. 스산한 바람이 부는 초겨울. 레트로 감성 가득한 폐역 앞에 서자 추억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사랑을 막 시작하는 연인들이여, 구둔역으로 가라
겨울이 되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더욱 기승이다. 주말이지만 좀처럼 대문 밖을 나서기 두렵다. 소파에 누워 이리저리 TV 채널을 돌리다 발견한 추억의 영화 ‘건축학개론’. 2012년 개봉한 영화에서 ‘국민 첫사랑’으로 등극한 수지(서연 역)와 이제훈(승민 역)이 철길 위에 올라 양팔을 뻗어 중심을 잡으며 나란히 걷는다. 지금보다 훨씬 풋풋하고 앳된 영화 속 주인공들의 모습이 좀 낯설다. 벌써 8년이나 지났으니 그럴 수밖에. 첫사랑의 떨림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간이역과 철길. 스마트폰은 단 한 번의 검색으로 영화속 배경이 지금은 운행이 중단된 경기도 양평의 폐역, 구둔역임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마침 날이 좋으니 영화 속 장면처럼 걸으며 ‘코로나블루’를 날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벌떡 일어나 늦잠을 자던 아내를 깨워 양평으로 달린다.
검색하다 발견한 남양주의 다른 폐역 능내역도 꽤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마침 양평으로 가는 6번국도 인근에 있어 돌아오는 길에 들르기로 하고 먼저 구둔역으로 향한다. 양평의 대표 여행지 용문사 가는 길 표지판을 지나서도 차는 30여분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른다. 과연 이런 곳에 역이 있을까. 내비게이션을 의심하며 ‘지평 막걸리’로 유명한 지평면 일신리로 들어서 고갯길을 넘자 언덕 위에 아담한 구둔역이 모습을 드러낸다.
붉은 벽돌담과 하얀 역사 건물에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글씨체로 적힌 구둔역 간판. 그리고 지금은 잎이 모두 떨어진 커다란 은행나무가 시간여행으로 안내한다. 문을 열고 역사 안으로 들어섰다. 열차 운행 시간표와 요금이 빽빽하게 적힌 안내판은 아직 그대로여서 금방이라도 열차가 올 것 같다. 자세히 보니 안내판은 많은 연인들의 이름과 하트 낙서로 뒤덮였다. 그리고 벽에 걸린 ‘구둔역 이야기’를 담은 사진들. 오랜 시간 구둔역을 지킨 역무원들이 활짝 웃는 모습과 마지막 운행 열차 사진이 옛 추억을 전한다. 건축학개론의 철길 장면도 당연히 걸렸고 가수 아이유가 구둔역 앞에 자전거와 함께 선 사진도 보인다. 2014년 발매된 리메이크 앨범 ‘꽃갈피’도 여기서 촬영했다. 예능 ‘불타는 청춘’에서 사랑을 맺은 김국진과 강수지가 나란히 손을 잡고 걷는 모습도 방영돼 이제 구둔역은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이 추억을 남기는 곳이 됐다.
반대쪽 문을 열면 승강장과 철길. 서너 커플이 영화 속 주인공처럼 팔을 벌리며 철길 위를 걷거나 손을 잡고 천천히 산책하며 겨울 햇살을 즐긴다. 예상보다 찾는 이들은 많지 않아 한가하다. 1940년 4월 중앙선 간이역으로 시작했으니 구둔역의 나이는 올해로 80살. 청량리역에서 출발한 무궁화호 열차는 하루에 몇 차례 구둔역에서 손님을 태우고 내렸다. 하지만 청량리∼원주 간 중앙선이 복선화되고 노선이 반듯하게 펴지면서 산골마을의 구둔역으로는 열차가 더 이상 지날 수 없게 됐다. 결국 2012년 건축학개론이 상영되고 얼마 뒤 문을 닫았다.
승강장에는 구둔역만큼이나 나이를 먹은 커다란 향나무와 선로 위에 영원히 멈춰 선 열차, 승강장의 나무 벤치가 어우러져 레트로 감성 가득한 풍경을 선사한다. 고목은 ‘소원나무’로 불리며 한때 여행자들의 소원지로 가득했는데 코로나19로 찾는 이들이 크게 줄어서인지 소원지는 찾아 볼 수 없다. 붉은 벽돌담이 에워싼 ‘고백의 정원’으로 들어서자 이끼로 덮인 커다란 고목에서 떨어진 낙엽이 수북하다. 남들 눈치 보지 않고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공간이란다. 이제 막 시작하는 커플이라면 용기를 내 사랑을 고백하고 미래를 약속하는 시간을 만들 수 있다.
#천년 은행나무에 노란 소원지 주렁주렁
워낙 유명해 식상하지만 돌아가는 길에 있으니 용문사도 들러본다. 이곳에도 레트로 감성이 충만하다. 주차요금을 내고 들어서면 마주하는 청춘뮤지엄 덕분이다. 교복에 ‘선도’ 완장을 차고 모자를 삐딱하게 쓴 고등학생이 입이 찢어져라 활짝 웃는 입구 조형물이 추억을 돋게 한다. 추억의 점빵, 교복체험, 옛날사진관, 청춘다방 등이 마련돼 타임머신을 타고 1970년대로 돌아간 듯하다.
용문사로 가는 산책로는 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나뭇가지 잎이 다 떨어져 황량하지만 계곡을 흐르는 시원한 물소리가 스트레스를 씻는다. 일주문 앞 다리 난간에는 소원을 적은 둥근 나무판들이 빼곡하다. “연수야! 시험 붙어서 컴백홈”, “우리 가족 아프지 말고 항상 행복하게 해주세요”라고 적힌 사연들이 주렁주렁 달렸다. 짧은 출렁다리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무려 1100살이 넘은 은행나무가 앞을 가로막는다. 사계절 많은 여행자들이 이 나무를 보려고 용문사를 찾는다. 높이 42m, 뿌리쪽 둘레 15.2m인 은행나무는 지금도 매년 350㎏가량의 열매를 생산한다니 대단하다.
노랗게 물드는 가을이 가장 아름답지만 잎이 모두 떨어져야 골격을 제대로 드러내는 요즘 풍경도 많은 상념에 빠지게 만든다. 굵은 몸통에서 갈라진 가지 끝에서 수많은 잔가지들이 다시 제멋대로 구불구불 휘어지며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뻗어나간 모습은 더욱 영험하게만 느껴진다. 잎은 없으나 대신 노란 소원지들이 은행나무 보호난간에 달렸다. 코로나19 탓에 건강을 바라는 글들이 많다. 소원지를 준비 못했지만 마음속으로 소원 하나 빌어본다.
#그림보다 더 그림 같은 겨울에 핀 꽃
용문사 다녀오느라 왕복 40분 정도 걸었더니 살짝 피로가 몰려온다. 능내역 가는 길에 커피 한 잔 마실 곳을 찾다 예쁜 유럽풍 카페 건물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카페 겸 미니식물원 ‘더 그림’. 커피 한 잔이 포함된 입장료가 8000원인데 문 닫을 시간이 다 됐으니 5000원만 내란다. 입구로 들어서자 마치 유럽의 아름다운 고성에 들어선 듯하다. 파스텔톤 노란 벽 위 얹어진 유럽풍 지붕과 알록달록한 벽돌색 기와. 넓은 정원 잔디밭에는 한가로이 양 세마리가 풀을 뜯고 운치 있는 소나무들이 주변을 꾸몄다. 놀랍게도 정원에는 붉고 하얀 꽃들이 만발하고 커다란 화분에는 핑크뮬리와 보라색 붓꽃까지 활짝 피었다. 겨울 맞나. 눈을 의심하며 가까이 다가가니 모두 조화다.
봄·여름·가을에 수많은 꽃들이 만발하지만 겨울은 썰렁하기에 손님들을 위해 조화로 꾸며놓았다는데 봄의 한가운데 선 듯 생화처럼 화사해 계절을 잊고 말았다.실내 식물원에 들어서면 비로소 생화를 만난다. 천사의 나팔꽃을 시작으로 국화, 사피니아, 체리세이지, 분홍바늘꽃, 패랭이 등 다양한 꽃들이 마음을 녹인다. 볼거리가 많아 시간을 끌다 보니 어느덧 해가 떨어진다. 넓은 카페 창으로 바라보는 아름다운 일몰은 아쉽게도 너무 짧다.
카페에서 너무 지체했다. 능내역으로 차를 몰았지만 도착하니 캄캄한 어둠이 내렸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은 것을 후회하던 마음은 금세 사라진다. 따뜻한 가로등 불빛이 골목을 비추는 능내역 골목 야경이 매우 낭만적이다. 승강장으로 들어서면 레트로 여행의 마지막 페이지가 완성된다. 곧 쓰러질 듯 낡은 역사 건물과 계단을 내려서면 만나는 철길 위에 은은한 조명이 내려앉아 누구라도 인생샷을 건진다.
승강장 맞은편은 추억의 역전집. 안에는 사내 서넛이 소주잔을 기울인다. 김치전 부치는 냄새가 문틈으로 흘러나오는데 고향에 온 듯 정겹다. 문을 열고 들어가 잔치국수 곁들여 김치전 먹고 싶은 맘이 간절하다. 하지만 코로나19 감염이 걱정되니 다음을 기약하며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
양평=글·사진 최현태 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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