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은 18세기 초에도 중국인의 환심을 사는 데 유효한 수단이었다. 서구 상인들과 달리 미국 상인들은 현금지불에 능해 중국인의 호감을 살 수 있었다. 당시 은화는 교역의 기축통화였다. 주요 생산지는 스페인령의 미주 지역이었다. 은화 수출이 미국의 대중국 무역의 주를 이룰 수 있었던 이유였다.
미국의 은화는 아편으로 겪는 청나라의 경제난에 구세주와 같았다. 아편 수입의 증가로 중국의 무역수지가 균형을 상실할 위기를 맞는다. 미국의 은화로 중국은 아편전쟁(1840) 이전으로 앞당겨질 뻔한 경제위기를 막을 수 있었다. 가령, 1807년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아편 수입으로 340만 은화 달러의 수익을 올릴 때 그해 미국은 620만달러어치의 은화를 수출했다.
미국은 역시 축복받은 땅이었다. 1859년 네바다주 데이비드슨산에서 사상 최대의 은광이 발견된다. 1840년대 미 서부의 금광 발견으로 ‘골드러시’가 일어났다면 은광은 1857년의 ‘실버러시’를 유발했다. 이의 최대 수혜자 중 한 명은 당시 캘리포니아은행장 윌리엄 랠스턴이었다.
그런데 미 의회가 1873년에 ‘화폐주조법(Coinage Act of 1873)’을 통과시켰다. 세계의 화폐체계가 금은 복본위제에서 금본위제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결과였다. 은화 주조가 미국에서도 중단되었다. 은부자 랠스턴에게는 그야말로 비보였다. 비즈니스의 귀재였던 그는 헨리 린더먼 전 조폐국장과 함께 미 은화를 무역통화로 전환하는 방도를 모색한다.
화폐주조법은 그의 구상을 채택했다. 세계가 금본위제로 가면서 은화 주조가 중단되었고 미국 상인들이 멕시코 은화 프리미엄을 지불하지 않음으로써 이익을 누릴 수 있다는 논리가 통했다. 미국은 이후 4년 동안 3600만달러어치의 은화를 주조했다.
현실은 그러나 은화의 가치 폭락이었다. 상업의 중심지 상하이에서도 헐값에 거래되었다. 미 의회는 1876년에 은화주조를 완전 폐지한다. 이를 예견이라도 한 듯 랠스턴은 전년도에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주재우 경희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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