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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손을 거치면 새것이 된다… ‘상도동 박가이버’의 매직 [밀착취재]

입력 : 2021-07-04 08:00:00 수정 : 2021-07-04 11:4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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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내공의 ‘수리 맛집’ 현대전파사

한때는 동작구서만 180개 달하던 전파사
고장나면 버리는 시대라… 10곳도 안 남아
우리는 꼼꼼한 솜씨 소문나 형편 나은 편
최근 가습기 수리로 유명세 ‘제2 전성기’
직접 제작한 확대경을 이용해 수리할 부분을 세밀히 살피고 있는 박씨.

서울 동작구 상도동 한 재래시장. 시장골목 중간쯤에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질 전파사(電波社)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현대전파사 주인 박인수(74)씨가 한눈에 보기에도 낡은 선풍기를 나사 하나하나 조심스레 풀어가며 분해하고 있다. 회전부 전자기판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박씨가 서랍에서 교체할 부품을 찾아 납땜을 하고 다시 조립한다. 스위치를 조작하니 멈춰버린 선풍기가 새것처럼 쌩쌩 돌아갔다. 수리가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 끝난 게 아니라며 박씨는 물걸레로 먼지 쌓인 선풍기 곳곳을 깨끗이 닦아냈다. “이렇게 깔끔하게 해서 보내야지 안 그러면 제가 마음이 불편해요. 또 수리 맡긴 분도 받아볼 때 기분이 좋겠죠.”라며 박씨는 그제야 수리를 마무리했다.

박인수씨가 선풍기를 수리하고 있다. 박씨는 얼마든지 고쳐서 쓸 수 있는 전자제품들이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수리를 마친 가습기 기판에 방수효과를 위해 기름코팅을 하고 있다.
출장 나온 박씨가 노인들이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콘센트를 침대 머리맡에 설치하고 있다.

1978년 이 동네에 전파사를 개업한 박씨는 보조기사까지 두고 운영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고 한다. 라디오, TV, 전축 등 집에서 쓰던 전자제품이 고장나면 으레 전파사를 찾아 수리를 맡기던 때였다. 하지만 전자제품 제조업체의 애프터서비스센터가 늘어나고 저렴한 중국산 전자제품들이 몰려오면서 전파사 운영은 점점 힘들어졌다.

박씨의 수리일기. 제품별로 수리 시 주의점 등을 꼼꼼히 기록해 오고 있다.
수리에 필요한 부품을 보관하는 서랍장. 생산이 중단된 부품이 많아 수리할 수 없는 제품이 늘어가고 있다고 한다.
오랜 세월 함께한 각종 공구들이 서랍 속에 가득하다.
1978년 개업 때부터 함께 한 미제 테스터기. 현대전파사 보물 1호다.

“한창때는 동작구에만 전파사가 180여개 됐었는데 지금은 열 곳도 안 남았어요. 전자제품이 고장나면 수리해서 쓰기보다 버리고 새로 사는 시대이니 버티기 쉽지 않죠. 사람이 아닌 로봇이 제품을 만들어내는 세상에 사람의 손으로 수리할 수 있는 제품도 이제 몇 안 됩니다. 우리 전파사는 동네에서 꼼꼼하게 잘 고쳐주는 걸로 소문나서 형편이 좀 나은 편이지만요.”라고 전파사들의 처지를 박씨는 담담히 전했다.

수리를 마친 제품을 손님에게 전달하며 사용상 주의점 등을 얘기해 주고 있다.

전자제품 수리와 주택 전기설비 일을 병행하며 근근이 버티던 ‘현대전파사’에 몇 년 전 새로운 변화가 찾아왔다. 전국에서 가습기 수리의뢰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직접 수리할 제품을 가지고 찾아오기도 하고 택배로 보내오기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동네 손님이 맡긴 독일제 가습기를 수리해 준 일이 있었는데 그 손님이 개인 블로그에 현대전파사에서 아주 만족스럽게 수리를 받았다는 내용의 후기를 남긴 것.

박인수씨와 부인 임순임씨가 전파사 앞에서 하트 포즈를 취하고 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전파사를 계속 운영해 나갈 계획이다.

“저는 인터넷도 할 줄 모르고 전화도 2G폰을 쓰고 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죠. 아들이 찾아 보여준 인터넷 블로그에 제가 소개돼 있는 게 너무 신기했어요. 보람도 많이 느꼈고요. 아직도 저를 찾아주는 분들이 이렇게 많은데 힘이 남아 있는 한은 언제까지고 계속 전파사를 운영할 겁니다.”라며 상도동 맥가이버 할아버지 박인수씨는 허허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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