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니실린·기적의 사과 등 대표적
우연은 준비된 자에게만 미소지어
무엇인가 갈망해 이뤘다면 ‘필연’
얼마 전 짬을 내어 휴양림에서 아내와 낙엽이 두껍게 쌓인 산자락 둘레길을 돌며 하루를 보냈다. 다음날 호수길을 지나다 본 식당이름이 ‘세렌디피티’였다. 특이해 늦은 아침을 먹으러 들어갔다. 통유리 밖으로 하늘을 담은 드넓은 호수가 한눈에 들어오고, 단풍으로 곱게 물든 산이 호수를 싸고 그림처럼 펼쳐졌다. 사람이 많았는데 운 좋게 가장 경관 좋은 창가자리로 안내해 줬다. 음식도 일품이고 중앙에 위치한 화덕난로도 조금 쌀쌀한 날씨에 포근함을 더해줬다. 새삼 식당 이름이 가슴에 와 닿았다.
‘세렌디피티’는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영국의 18세기 문필가였던 호레이스 월폴이 처음 사용한 말이라 한다. ‘우연히 운 좋게 새로운 것을 발견할 때 쓰는 말’이다. 특히 과학 분야의 경우 실패한 실험이나 평범한 일상에서 위대한 발견이나 발명을 도출해 낼 때도 이 말을 쓴다. 페니실린 발명이 대표적이다. 영국의 세균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은 세균 배양실험 도중 푸른곰팡이가 오염돼 균이 자라지 못하는 것을 보고 힌트를 얻어 푸른곰팡이가 분비하는 페니실린을 발견했다.
이 페니실린으로 1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병사를 패혈증에서 구했고, 20세기 항생제 개발의 문을 열었다. 플레밍은 페니실린을 발견하기 몇 년 전 세균의 세포벽을 분해하는 효소 리소자임을 발견했는데, 이 또한 세렌디피티로 불린다. 플레밍은 깔끔한 연구자가 아니었나 보다. 실험 도중 배양용기에 콧물을 떨어뜨렸는데 콧물이 떨어진 곳에 세균 성장이 억제되면서 반투명한 원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 이에 착안해 사람의 분비물에 리소자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규명했다. 리소자임이 발견되면서 사람과 동물의 체액이나 점액 속에 미생물을 제거하는 1차 방어 면역 체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처음 알려지게 됐다.
갈증이 심할 때 물을 마시고 해갈하는 과정에서 세포가 빠른 속도로 물을 흡수하는 기전은 삼투압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존스홉킨스대 피터 아그레 교수는 1988년 세포막 단백질을 분석하다 ‘우연히’ 적혈구 세포막에서 물의 능동수송을 담당하는 아쿠아포린이란 새 단백질을 발견해 100년의 숙제를 풀어 노벨상을 수상했다.
일본의 ‘기적의 사과’ 이야기도 세렌디피디의 일종이다. 1990년대 일본 아오모리현의 기모라 이키모리는 자연농법을 고수하다 연이은 실패로 자살 직전까지 갔다. 마지막으로 산에 올랐다가 방치된 도토리나무가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을 보고 최대한 방치한다는 역발상으로 사과농장을 운영했다. 잡초가 무성한 가운데 자란 사과나무가 태풍에도 견디고 병충해에 강하며 썩지 않는 ‘기적의 사과’를 만들어냈다. 새로운 농법이 정착됐고, 그는 세계적인 화제의 인물이 됐다.
사소한 일상에서 위대한 발견이나 발명으로 이어지게 하는 생각을 ‘세렌디피티적 사고’나 ‘우연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생각의 폭이 좁은 사람, 편집증적 사고체계를 가진 사람에게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우연이라 말하지만 개발자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모두 무심코 넘어가는 사소한 일에도 창조적인 가능성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었기에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된 것이다. 미생물학자 파스퇴르의 말처럼 “우연은 준비된 자에게만 미소 짓는다.” 결국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준비된 자에게 우연으로 가장된 행운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피터 첼솜 감독이 2001년 제작한 영화제목도 ‘세렌디피티’다. 존 쿠삭과 케이트 베킨세일이 주연한 이 영화는 전혀 모르는 두 남녀가 크리스마스 이브 뉴욕 백화점에서 물건을 고르다가 우연히 만나 몇 시간 식당과 공원에서 환상적인 데이트를 하고, 서로 연락처도 모른 채 운명에 맡기고 헤어진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 식사한 음식점이 ‘세렌디피티’다. 시간이 지나도 서로에 대한 사모함이 수그러들지 않아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찾아 나선다. 천신만고 끝에 처음 만났던 공원 스케이트장에서 재회하는 장면으로 영화가 끝난다. “본래 우연이란 없다. 무엇인가를 간절히 소망했던 사람이 발견하거나 만들어 냈다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데미안’에서 헤르만 헤세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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