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법원장 취임 1년 만에 스스로 물러나
“후배들한테 길 터주기 위해 용퇴” 평가
택시 운전기사가 액화천연가스(LPG)에 중독된 것은 직업병에 해당한다는 국내 첫 판결로 유명한 안상돈 전 부산고등법원장이 5일 오후 별세했다. 향년 82세.
1940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경북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고인은 1963년 고시 사법과 16회에 합격하며 법조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1968년 대구지법 의성지원 판사로 임용돼 대구지법 부장판사, 부산지법 마산지원장, 부산지법 동부지원장, 부산고법 부장판사, 부산지방법원장 등을 거쳐 1996년 부산고등법원장으로 퇴직할 때까지 30년 가까이 사법부에 몸담았다.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첫 임지도 대구지법 관할이었으나 이후 생활 터전을 부산으로 옮기며 부산지역의 ‘향토법관(향판)’이 되었다.
고인은 부산고법 부장판사로 일하던 1991년 12월 내린 이른바 ‘LPG 중독 직업병’ 판결로 유명하다. 당시 택시 운전기사로 일하다가 고혈압, 두통 등 LPG 중독 증세로 쓰러져 해고된 근로자 2명이 “직업병으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부산지방노동청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노동당국은 ‘LPG 중독은 직업병이 아니다’라는 입장이 확고했지만 고인이 재판장으로 있던 부산고법 합의부는 원고들 손을 들어줬다. 당시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원고들의 증세가 LPG 중독이 유일한 원인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면서도 “운전 업무에 따른 누적된 피로와 오랜 시간에 걸친 LP가스 흡입 및 그로 인해 악화한 고혈압 증세가 복합돼 이 증세가 일어났다고 판단되므로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이는 택시 운전기사들의 LPG 중독을 직업병으로 인정한 국내 첫 판결이라 법조계는 물론 노동계로부터도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박정희정부 시절에 젊은 법관 생활을 보낸 고인은 본인 의사에 반해 군대에 갈 처지에 놓인 운동권 대학생을 상대로 청구된 구속영장에 퇴짜를 놓은 일도 있다. 1969년 당시 경찰은 모 대학 4학년생으로 호헌학생 총회장 물망에 오르던 A씨한테 병역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입영영장이 발부되었는데도 입영을 기피했다는 이유를 들었으나 영장을 심사한 고인은 “도주 및 증거인멸 우려가 없다”며 기각해버렸다.
고인은 향판으로 영남지역 법원에서만 근무했지만 지방법원 부장판사에서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또 지법원장에서 고법원장으로 빠르게 승진해 ‘관운이 좋다’는 평을 들었다. 부산지법원장으로 재직하던 1995년 부산고법원장으로 수직상승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당시 고인은 공사석에서 “1년만 채우고 나가겠다”고 말했다. 다수는 이를 농담으로 받아들였으나 1996년 2월 정말로 대법원에 사표를 내 법조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이를 두고 ‘법원 후배들한테 길을 터주기 위해 용단을 내린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당시 사법부는 전국의 지방법원장급 이상 고위 법관 중 정년퇴직자가 5년 내에는 한 명도 없었을 정도로 인사적체가 극심한 상황이었다.
고인을 기억하는 이들은 “원만한 성격으로 사람 좋다는 평을 많이 들었다”면서도 “재판 업무에서는 매사에 신중했던 분”이라고 말한다. 독특한 화술과 뛰어난 언변으로 회식 등 각종 자리에서 좌중을 이끄는 재담가로 통했다. 부산지역 법관들은 물론 일반 직원들도 고인을 ‘보스’라고 부르곤 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유족은 자녀로 안은주·병하(강원대 로스쿨 교수)·병준씨(현대제뉴인 책임), 사위로 권기훈씨(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며느리로 최승희·박선미씨가 있다. 빈소는 부산 남천성당, 발인은 8일 오전 5시20분이다. (051)623-4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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