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의 섬, 우도(牛島)에 훈데르트바서파크가 문을 열었다. 우도에 들어선 대규모 테마파크에 22년 전 작고한 오스트리아의 화가이자 건축가인 훈데르트 바서의 이름이 붙은 이유는 뭘까. 그가 생전에 환경운동에 심취했기 때문이다. 한국에 방문한 적 없는 훈데르트 바서가 우도에서 이름을 알리게 된 배경, 한때 주민 반대가 극심했던 우도에 8년여 만에 들어선 파크 이야기를 나눈다.
◆훈데르트 바서는 누구인가
파크 측은 바서에 대해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와 함께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3대 화가 중 한 명”이라며 “가우디와 더불어 가장 독창적인 건축가, 자연을 사랑한 환경운동가”라고 소개했다.
오스트리아 빈의 레오폴드 뮤지엄이나 벨베데르 궁을 여러번 들러 실레의 생을 엿보고 키스 등 클림트의 작품을 감상했지만 바서는 생소했다. 책과 인터넷을 뒤적이고서야 어느 순간 지나쳤을법한 이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클림트와 가우디에 열광한 기인이었다.


바서는 1928년 독일계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21세 때인 1949년 슈토 바서에서 훈데르트 바서로 이름을 바꿨다. ‘슈토’는 슬라브권 언어에서 ‘100’이나 ‘고여있다’는 의미인데, ‘바서’가 물이니 ‘고인 물’로 읽히기 싫어 독일어로 100을 의미하는 ‘훈데르트’로 바꿨다. 그의 이름은 ‘100개의 물’ 또는 ‘100개의 강’이다. 일본과 베네치아에 살 때에도 이름을 바꿔 생전에 이름 4개를 가졌다.
바서는 1975∼1983년 5개 대륙의 미술관들을 순회하며 명성을 쌓았다. 호주와 뉴질랜드 주요 도시에서 전시회를 했고, 1973년 첫번째 일본 석판화 앨범 ‘나나하쿠미즈’를 출간했다. 미국 워싱턴시는 1980년 ‘훈데르트바서의 날’을 선포했다. 사법부 인근에 기념 식수를 하고 의회에서 핵에너지 반대 연설을 여러 번 했다. 같은 해 빈 시의회가 의뢰한 ‘훈데르트바서하우스’ 모델을 발표하면서 합리주의 건축 양식에 반기를 든 ‘건축의 의사’라는 평을 들었다.
직선이 아닌 곡선을 좋아하고, 대중이 예술에 창조적으로 관여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대학 강단에 설 때 학생들에게 학교를 떠나라고 권하고, ‘제3의 피부’로 명명한 주거 공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나체 시위에 나서는 기행도 일삼았다. 젊은 시절 바서는 말끔한 정장을 입은 잘생긴 청년이었지만 옷과 신발을 직접 만들어 기성복에 대한 반항을 나타내기도 했다.



바서는 1985년 빈 훈데르트바서하우스가 개관하면서 건축가로서도 명성을 높였다. 부유층은 입주할 수 없는 아파트 50개에 시민들이 줄을 섰다. 이후 빈의 슈피텔라우, 지역난방발전소, 고속도로 휴게소 레스토랑 바트 피샤우 등 15년간 친환경 건축 프로젝트 50여개에 몰두했다. 빈 쿤스트하우스는 가구 공장이 미술관으로 재탄생한 사례다. 1997년 문을 연 블루마우의 온천마을 ‘롤링힐즈’는 바서가 맡은 가장 큰 프로젝트로 완성까지 7년이 걸렸다.
생전에 세네갈 대통령을 만나고, 일부 국가의 국기와 유엔 세계인권선언 채택 등을 기념한 우표들도 디자인했다. 노르웨이 환경부의 산성비 방지 캠페인에 동참하는 등 사람과 자연, 건축에 대한 고민들을 사회에 반영했다.
일본인을 두번째 부인으로 맞은 바서는 일본식 목판화에 몰두했지만, 한국을 방문한 적은 없다. 판화에는 ‘백수’(百水)라는 낙관이 찍혔다. 바서는 건축을 위해 땅을 개간하다 나온 나무들을 건물 옥상에 옮겨 심는 ‘나무 세입자’ 철학을 실천했다. 식물을 단계적으로 이용한 자연 정수 시스템을 고안하고, 환경을 고려한 부엽토 변기를 만드는 등 실생활에서 환경친화적 제품을 사용해 유럽 각국에서 환경보호상을 받았다. 이처럼 자연과 공존하는 건축물을 추구했다. 지역 난방시설이나 혐오시설도 바서의 손길로 하나의 예술 작품이자 건축물로 재탄생했다.



바서가 국내에 알려진 가장 큰 계기는 2018년 제주에 문을 연 몰입형 미디어아트 ‘빛의 벙커’다. 클림트 작품으로 꾸며진 주요 전시에 바서 작품들로 구성된 기획 전시가 뒤따랐다.
◆각시물에서 훈데르트 바서로
훈데르트바서파크는 우도 남쪽 우도봉 기슭 톨칸이 해변에 자리잡았다. 천진항에서 도보로 5분 거리다. 바서의 삶과 우도 최대 개발사업의 과거를 들여다 보면 그의 이름이 붙은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자연경관 보전지구 1등급인 톨칸이 해안에서 대규모 개발사업이 추진된 건 2014년이다. 당시 ‘우도 각시물 조성사업’ 계획은 콘도와 박물관, 미술관, 레스토랑 등을 포함했다. 톨칸이 해안 인근 각시물은 사랑과 다산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전해지는 우도에서 가장 오래된 연못이다.


당시 우도연합청년회와 해녀들은 “경관이 훼손되고 하수가 추가로 발생해 환경 파괴가 극심할 것”이라며 반대해 각시물 사업은 좌절됐다. 이후 사업주체가 바뀌고 주민 설득 작업이 몇년간 이어졌다. 그러다 바서의 삶과 철학이 새로운 개발 테마가 됐다.
결국 2020년 6월부터 1만5000평 규모에 800억원이 투자된 파크 공사가 진행됐다. 이제 바서의 철학이 담긴 훈데르트바서뮤지엄, 우도갤러리, 훈데르트바서파크 기념품 숍 등이 여행객을 기다린다. ‘색채의 마술사’라는 명성답게 건물의 색감이 대담하고 화려하다. 뮤지엄에는 바서의 그림 24점과 판화 23점이 전시된다. 바서 작품만 전시하는 신축 뮤지엄은 우도가 처음이고, 블루마우 온천마을을 제외하곤 가장 큰 프로젝트다. 우도갤러리는 국내·외 예술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기획 전시장으로 꾸며졌다. 오는 6월까지 전이수 작가의 ‘소중한 사람에게’가 전시된다.


환경 보존에 힘을 쏟은 오스트리아의 화가이자 건축가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몇년 만에 주민들의 마음을 움직여 지금의 파크가 자리잡게 됐다.
훈데르트바서파크 임병철 대표는 “부지를 먼저 확보한 뒤 콘텐츠를 고민하다 자연친화적이면서 독특함을 갖고 있는 작가를 찾게 된 것”이라고 소개했다. 나무 세입자 철학대로 사업부지에 자라던 수목 1600주를 옮겨 심고 개발하며 나온 토지를 옥상으로 올렸다. 사업부지의 45%가 녹지가 된 배경이다.


파크 건설을 위해 훈데르트바서재단과 수시로 협의한 이상협 팀장은 “계획된 대로 만들어진 게 없다”며 “기둥과 창문, 계단은 물론 경첩 하나까지 재단에서 몇 번이나 수정을 요청해 완성된 것”이라고 했다. 그 결과 78개의 기둥, 131개의 유리창의 모습이 모두 다르다. 이 팀장은 “개별 설계도가 있지만 건물을 구성하는 각 요소에 개성과 독창성을 부여함으로써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켰다”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2018년부터 바서 재단과 협의를 시작했다. 이 팀장은 “재단은 바서의 철학을 담은 코드를 모든 분야에서 요구했다”며 “코드를 정형화하지 않고 공사하는 노동자가 예술적 창의성을 부여하라는 식”이라고 소개했다. 창문 외곽의 타일 디자인을 노동자 자율에 맡겼다는 것이다. 처음에 적응하지 못하던 인부들도 나중에는 재밌게 작업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5년간 재단과 ‘바서 코드’ 협의를 위해 주고받은 메일만 1000통이 넘는다. 창문 한개당 7∼10번씩 수정을 거쳤다. 모든 창문에 사람처럼 개성이 있다는 취지다. 건물에는 초록색을 쓰지 않았다. 자연이 바로 초록이라서다.
파크에는 400평 규모의 대형 카페인 훈데르트윈즈, 유럽 노천카페를 모토로 한 카페 ‘레겐탁’, 우도의 비경 톨칸이 해변과 우도봉 인근 큰 바위 얼굴을 품고 있는 카페 ‘톨칸이’ 등이 있다. 레겐탁은 바서가 항해에 나서거나 작업 활동을 이어간 목조 범선으로, 영화 제작자와 함께 찍은 동명의 영화가 칸 영화제에 출품됐다. 각시물도 파크 중간에 보존됐다.


옥상 정원의 파란색 양파 첨탑은 가장 좋은 경치를 구경할 수 있는 장소다. 우도봉과 등대, 큰바위 얼굴이 모두 보인다. 인근 돌담길에는 백개의 얼굴이 형상화돼 있다. 객실 48개가 있는 훈데르트힐즈 등 일부 시설은 재단 인증을 받지 못했다. 다른 건물들과 달리 ‘바서 코드’를 배제했다는 이유다. 뮤지엄과 갤러리 등 입장료를 받는 시설들만 재단 인증을 거쳤다. 조현철 훈데르트파크 회장은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는 바서의 철학을 반영해 건물의 외형, 기둥, 창문, 벽, 계단, 광장 등 대부분의 공간을 곡선으로 구현했다”며 “외국인들이 파크를 먼저 예약하고 비행기 표를 사서 제주를 찾는 일이 생길 것”이라고 장담했다.
◆바서와 우도를 담은 말차이트(Mahl zeit)의 요리들
훈데르트바서파크의 일부이지만 바서 재단의 인증을 받지 못한 숙박시설 훈데르트힐즈의 캐주얼 다이닝 레스토랑 ‘말차이트’(Mahl zeit)는 “맛있게 드세요”라는 독일인들의 식사 인사다.
최용대 셰프는 “말차이트의 메뉴의 시작은 제주와 우도에 스며드는 것에 중점을 두고 시작했다”며 “기획·개발 과정에서 제주스러움을 포함한 모던함을 추구했다”고 소개했다. 제주의 색깔과 훈데르트 바서라는 공통 주제를 살리기 위해 거의 모든 음식에 한국의 대표적 식재료인 마늘과 바서의 엠블럼과 같은 양파를 사용했다고 그는 덧붙였다.


말차이트의 시그니처 메뉴는 ‘뿔소라 갈치속젓파스타’다. 이름에 재료가 모두 드러나는 솔직한 메뉴인데 ‘갈치속젓’이 파스타의 풍미를 끌어올린다. 최 셰프는 “갈치속젓과 뿔소라는 단연코 제주와 우도를 대표하는 재료”라며 “불호의 맛을 잡기 위해 최대한 갈치속젓 소스에 집중한 메뉴”라고 소개했다.


현무암 슈네첼은 보편적인 잼 형태의 소스를 벗어나고 싶어 그린 올리브와 한라봉을 조합해 상큼함과 이국적인 맛을 내려고 노력했다. 흑돼지불고기가 곁들여진 시트러스카프레제는 한라봉, 귤, 천혜향, 레드향 등 제주에서 나는 시트러스 계열 과일을 모두 사용했다. 한라봉간장소스 도새기강정은 튀긴 제주 돼지를 과하지 않게 새콤달콤한 간장소스로 한번 더 버무린 돼지고기 강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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