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 전전하거나 나홀로 ‘집콕’
2021년 상반기 노인 우울증 5.7%↑
어르신들 “그간 갈 곳 없어 막막
여기선 바둑·장기… 하루 즐거워”
고령 사망비중 여전히 94% 달해
“경로당 활동 가이드라인 필요”
“이 양반아, 빨리 좀 쳐. 이러니 ‘노인정 화투’란 말이 나오는 거여.” “기다려 봐. 어떻게 해야 피박을 면할 수 있는지 생각하고 있잖어.”
지난 19일 오후 3시 서울 관악구의 한 경로당은 어르신들의 화기애애한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화투를 치던 김화성(92)씨는 “두 달 만에 경로당에 나왔는데 이보다 좋을 수가 없어”라며 “할멈들이랑 이렇게 얘기하면서 화투 치는 게 사는 낙이야”라고 말했다. 옆에서 있던 또 다른 어르신도 “화투 칠 때 쓸 10원짜리 동전만 몇 개 있으면 하루 종일 재밌어. 집에 혼자 우두커니 있으면 우울증 걸릴 것 같은데, 이렇게 다같이 모여서 노니까 얼마나 좋아”라며 아이처럼 웃었다.
24일 서울시에 따르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오미크론 변이 확산으로 지난 2월14일부터 문을 닫았던 경로당들이 속속 운영을 재개하고 있다. 관악구와 서초구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된 지난 18일부터, 중랑구는 지난 20일부터 각각 경로당 문을 열었다. 나머지 자치구들은 25일부터 경로당을 다시 운영한다. 코로나19 3차 백신 접종자에 한해 이용할 수 있지만, 그동안 갈 곳이 마땅치 않아 집에만 머물거나 공원 등을 전전하던 노인들이 활기를 되찾는 모습이다.
경로당 폐쇄는 노인들에겐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지난 20일 관악구의 또 다른 경로당에서 만난 장문재(84)씨는 “여기 문 닫았을 때 갈 곳이 없어 막막했다. 그저 골목길에 앉아있거나 보라매공원에 가곤 했다”면서 “오랜만에 동네 노인들과 바둑·장기도 두고, 화투도 쳤다. 이곳에 있으면 할 게 너무 많다”고 했다. 장씨와 이야기 중이던 정수부(81)씨도 “그간 구청에 경로당 좀 다시 열어달라고 수없이 얘기했다”며 “이제야 속이 다 후련하다”고 말했다.
경로당 한쪽 벽엔 ‘다툼이 있을 시 징계위원회 회부’라는 공지사항이 붙어있었다. 정씨는 “화투 치다 ‘피박이네, 아니네’를 두고 싸우기도 하고, 다들 고향에서 치던 규칙을 서로 우기면서 실랑이를 벌이기도 해. 한창 대선 정국일 땐 정치 얘기로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지”라면서 “엄포용 공지사항을 붙여놓긴 했지만 소용 없어. 싸우고, 또 화해하고 그게 다 세상 살아가는 재미 아니겠나”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거리두기 해제로 가족·친지들과의 만남이 자유로워지고, 경로당 등 노인복지시설 및 요양시설에서 접촉 면회(30일∼5월 22일 한시적) 등이 허용되면서 고립된 생활로 우울증을 겪는 고령층도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최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7월 우울증으로 진료를 받은 60세 이상 고령층은 96만9167명으로 전년 동기(91만6612명) 대비 5.7% 많았다. 보라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오대종 교수와 분당서울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기웅 교수 연구팀은 최근 “코로나19 유행 이후 60세 이상 고령층의 우울증 발병 위험이 2배가량 증가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서울시에서 설립한 노인전문 사회복지기관인 서울노인복지센터도 신규 프로그램을 개설한 뒤 지난 21일부터 참가자를 모집하고 있다. 영어회화와 미술, 제로웨이스트 실천법 등 종류도 다양하다. 서울노인복지센터 관계자는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 후 새롭게 시행할 5~6월 프로그램의 신청자를 받고 있다”며 “마스크 착용 등 방역수칙은 준수해서 교육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거리두기 해제로 각종 노인 복지시설을 다시 개방하면서 코로나19 고위험군인 고령층의 감염 및 사망이 더욱 늘어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23일 코로나19 사망자 109명 중 102명(93.5%)이 60세 이상 고령층이다. 천은미 이대목동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경로당은 밀폐된 공간이다보니 한 명이 감염되면 연쇄적으로 감염될 확률이 꽤 높다”며 “프로그램을 진행하더라도 운동과 같이 비말이 많이 발생하는 활동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어 그는 “우리나라는 한 번에 방역수칙을 ‘확’ 풀어버리는 경향이 있다”며 “정부에서 경로당 프로그램 등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일정 부분 정해주는 것도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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