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 앞 멈추고 장애물 피해… 훈련 2년 가까이 소요
시각장애인 활력 주는 존재… 활동 많은 개에도 도움
과정 완수 비율 30%… 수요 많지만 양성 적어 한계
“안내견은 동반자”… 법적 규제보다 인식 개선 필요
“참아 같이 건너가자.”
지난 20일 경기도 성남시 서현역 인근 사거리. 녹색불이 켜졌다는 안내음이 들리자 기자는 시각장애인 안내견 ‘참이’에게 이처럼 말했다. 참이는 안대를 써서 앞이 보이지 않는 기자를 불안하지 않게 안정된 속도로 건너편까지 데려다주었다. 횡단보도를 건넌 뒤 잠시 걸음을 멈추자 참이도 발걸음을 멈췄다. “잘했어. 참아”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다시 함께 길을 걸었다.
안내견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시각장애인의 눈이 될까. 27일 세계 안내견의 날(4월 마지막 주 수요일)을 앞두고 삼성화재 안내견학교의 도움을 얻어 래브라도 리트리버 종의 두 살배기 참이가 시각장애인 안내견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지난 20일 동행 취재했다.
첫 만남은 어색했지만 ‘적응력’이 빠른 참이는 곧바로 기자에게 딱 붙어서 호흡을 맞췄다. 참이는 장애물이 있으면 살짝 피해가고 사람이나 차량이 지나가면 말하지 않아도 멈춰 섰다. 첫발을 내디뎠을 때는 앞이 보이지 않아 두려움이 컸지만 시간이 갈수록 걱정은 눈 녹듯 사라졌다. 삼성화재 안내견학교의 홍아름 지도사는 “놀 때는 제대로 놀고 보행할 때는 누구보다 안정된 친구”라고 참이를 칭찬했다.
◆활동량 많은 안내견… 장애인에 희생은 오해
시각장애인 안내견이 되기 위해서는 2년 가까이 걸린다. 생후 8주가 된 리트리버는 일반가정에 1년간 위탁되어 퍼피워킹(안내견이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적응시키는 일)을 거친 뒤, 다시 학교로 돌아와 종합평가를 받고, 이를 통과하면 6∼8개월간 도로, 상가, 교통수단 등 실생활 환경에서 훈련을 받는다.
이 과정을 통해 사람이 “가자”고 해도 차가 지나가거나, 계단, 에스컬레이터 앞에 가면 알아서 멈출 줄 알게 된다. ‘지적 불복종 훈련’으로(위험 상황에서 주인의 지시와는 상관없이 위험을 회피하도록 하는 훈련) 눈앞에 장애물을 인식하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필수과목이다.
훈련 방식은 점차 동물 친화적으로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훈련 중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목줄을 강하게 잡아끌거나 주의를 시켰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경우에는 아무런 피드백을 주지 않고, 대신 올바른 행동을 했을 때는 과하게 칭찬을 해주거나 간식을 주는 긍정 강화 훈련을 한다.
인파와 차, 오토바이, 자전거, 강아지, 비둘기 등이 뒤섞인 실 보행환경에서 이 같은 여러 방해요인에 한눈팔지 않고 보행에 집중할 수 있는 게 중요하다.
참이는 혼잡한 지하철 역사 안에서도 흔들림 없이 개찰구를 찾으라는 홍 지도사의 말에 따라 개찰구 불빛에 머리를 갖다 댄 뒤 멈췄다.
시각장애인이 아닌 주변인이 예쁘거나 귀엽다고 안내견을 만지거나 이름을 부르면 안 되는데, 보행 이외 요소에 안내견이 눈을 돌리게 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대부분 사람도 요즘은 이 같은 사실을 알기에 눈으로만 예뻐해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홍 지도사는 말했다.
충실하게 지시를 따르는 시각장애인 안내견이 장애인을 위해 희생한다는 편견도 더러 있다. 그러나 안내견으로 양성되는 개들은 걷는 것을 즐기는 성향을 가졌고 안내견은 이들에게 걸맞은 ‘직업’이라는 게 홍 지도사의 설명이다. 이날 참이는 1시간 동안 훈련받으면서 꼬리를 좌우로 흔드는 등 신이 난 듯했다.
홍 지도사는 “리트리버는 활동성이 많은 품종이라 (시각장애인과) 산책이나 이동을 해줘야 한다”며 “안내견에게도 시각장애인은 필요한 존재”라고 말했다.
안내견은 시각장애인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파트너다. 안내견 나감이와 1년째 생활 중인 시각장애인 최상민(42) 씨는 “나감이 덕분에 혼자서도 갈 수 있는 곳도 많아지고 걷는 즐거움을 되찾은 것 같다”고 말했다. 최씨는 “2014년 시각을 잃고 나서부터는 (지팡이로 걷는 것이) 너무 힘들고 걷는 속도도 느려져서 출근을 제외하고는 거의 움직이지 않게 됐지만 지난해 나감이를 만난 이후 산책을 할 때면 바람이 부는 것도 느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행복한 기분이 든다”면서 웃었다.
◆쉽지 않은 안내견 친구 되기… 인식 개선 숙제
안내견의 친구가 되는 과정은 쉽지 않다. 안내견의 파트너가 될 시각장애인은 안내견학교에 2주 동안 지내면서 자신과 함께할 개의 특성, 보행 방법 교육을 받게 된다. 다른 2주는 자신의 주거지와 주요 보행지역에서 교육을 받고 안내견과 신뢰를 쌓는다.
안내견학교 관계자는 “보통 강아지를 분양받을 때 한 달 가까이 합숙 및 교육을 받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라며 “시각장애인들은 오히려 안내견을 위해 많은 시간을 고민하고 연습하게 된다. 더 좋은 파트너가 되기 위해”라고 말했다.
아쉽게도 모든 시각장애인이 안내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021년 기준 전국의 시각장애인 중 안내견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심한장애’로 분류된 장애인은 4만7022명이다. 삼성화재 측은 이 중에서 생계활동을 하지 않는 미성년자나 개를 선호하지 않는 사람을 제외하더라도 필요한 수요를 1000명 내외로 추산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안내견을 양성하는 기관은 삼성화재 안내견학교와 한국장애인도우미견협회 등으로 국내에서 활동 중인 안내견은 70마리 내외다.
20일 기자와 함께한 참이는 다음 날인 21일 안내견이 되기 위한 2차례 시험을 통과하고 마침내 정식 안내견이 됐지만, 시각 장애인 안내견이 훈련을 끝까지 마치는 비율은 30% 수준에 그친다.
예전보다 많이 개선됐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대중교통 출입을 막는 등 안내견을 꺼리는 인식도 극복해야 할 과제다.
최씨는 “가끔 버스를 탈 때 다른 손님들이 ‘애완견’을 무서워하니 내려달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며 “안내견은 공격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반려동물과 달리 우리가 이동하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시각장애 유튜버 우령도 지난달 대기 줄이 긴 유명 식당에서 안내견은 출입할 수 없다는 말을 직원에게 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장애인복지법에 따라 안내견은 어디든 출입할 수 있고, 정당한 사유 없이 출입을 거부한 자에게는 과태료 300만원을 부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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