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 my god! Another smart girl? What should I do? (이런, 똑똑한 여자애가 하나 더 나왔어? 곤란하잖아.)”
성주그룹의 설립자이자 명품 패션브랜드 MCM의 최고비전책임자(CVO)인 김성주 회장에게 그의 부친이 했던 말이다. 학창시절 전교 1등 성적표를 받아오자 칭찬은커녕 낙담시키는 말이 쏟아져 충격을 받았다 한다. 광산업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고 김수근 대성그룹 회장은 7남매 중 가장 사업가 기질이 강했던 막내딸을 좀처럼 인정해주지 않았다.
아들들에게만 분배된 재산, 딸은 조신하게 좋은 집안에 시집만 잘 가면 된다는 인식의 가풍은 김 회장을 오랜 시간 위축시켰지만 역으로 오기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스스로 힘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일어서야 했기에 하드 트레이닝을 거치며 급성장할 수 있었다.
그가 2005년 전격 인수한 독일 브랜드 MCM은 이후 글로벌 럭셔리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입, 40여개국에 수출되는 등 한국 패션 산업의 세계화로 이어졌다. 김 회장의 부친은 결국 세상을 뜨기 전에야 “왜 다른 남자 형제가 아니라 네가 경영가의 자질을 타고 태어난 것이냐”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는 이를 아버지에게 받은 가장 큰 칭찬으로 회상했다.
지난 23일(현지시간)부터 25일까지 태국 방콕에서 열린 ‘2022 세계여성지도자회의(Global Summit of Women)’ 기간 김성주 회장의 이야기를 틈틈이 들었다. 명품 패션브랜드를 이끌고 있지만 정작 보석 하나 소유하지 않고, ‘힐 대신 스니커즈 신기’ 운동을 하는 그의 실용주의와 실력주의에 매료된 시간이었다. 명품을 소비하는 것이 아닌 판매하는 여성의 ‘플렉스’(flex)란 이런 것이구나를 실감했달까.
GSW는 매년 수백명에서 1000여명의 전 세계 여성 기업인과 사회 각계 명사들이 모여 글로벌 현안을 토론하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 활발히 교류하는 네트워크의 장이다. 올해는 51개국에서 600여명이 참석해 ‘새로운 현실 속 여성의 기회 창출’이라는 주제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여성 리더십을 논했다.
매년 GSW 후원사로 참석하는 김 회장의 MCM은 자선기부 팝업스토어와 글로벌 여성리더상 시상 등을 통해 거액을 지원하고 있다. 여성 리더 양성을 도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의지가 그만큼 강하다. 실제 그가 이끄는 성주그룹은 초기부터 400명 직원 중 300명이 여성일 정도였다. 현재도 여성 65% 남성 35%로 구성돼 있으며 임원진 성비는 5대 5다. 2009년 설립한 ㈜성주재단을 통해서는 기업의 순수익 10%를 적극적인 사회공헌활동으로 환원하고 있다.
올해 GSW에서 그가 여성 리더 롤모델로 참석한 멘토링 세션은 1시간 30여분 동안 김 회장의 자수성가 스토리, 질의응답 등으로 쉴 틈 없이 진행됐다. 김 회장의 강연에서는 야망을 가진 여성들에게 필요한 리더십 트레이닝, 글로벌 감각의 중요성은 물론 다양성과 포용력을 강점으로 급변하는 시대에 주인공이 될 여성 리더십의 가능성 등을 모색했다. 행사장 밖에서 짬을 내 만난 시간에는 한국의 젊은 여성을 위한 조언도 들었다. 그 주요 내용을 종합해 소개한다.
◆문제를 불평하고 낙담하기보다 ‘해결’ 하라…“감정과 태도를 컨트롤하는 훈련 필요”
“한국과 일본은 여성을 대함에 있어 최저선(bottom line)이라 할 만한 곳이다. 한국은 유교 문화와 제조업 중심 성장으로 남성의 힘을 기반으로 발전했고, 남북으로 나눠져 군사 국가가 되면서 여성을 더욱 무시해왔다. 일본은 ‘사무라이 문화’로 인해 역시 남성 중심 사회다.
최악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맞닥뜨리는 현실은 너무나 가혹하다. 여전히 여성의 역량을 담지 못한다. 내 경우 집에서 억지로 결혼시키려는 것을 피해 유학 와 독립한 것이 반항의 시작이었다. 다른 남자 형제들과 달리 어떤 지원도 받지 못했기에 바닥부터 시작해야 했다. ‘여자는 성공할 수도, 지도자가 될 수도 없다’는 것을 주입당하며 자란 탓에 자신감을 갖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를 극복하기까지 무려 10년이 필요했다.
그러나 가부장적 부모도 여성을 무시하는 사회 환경도 내가 택할 수 없는 영역이다. 세계 어디서든 모두가 저마다의 문제를 갖고 있다. 나 자신만 문제가 있다고 과장해선 안 된다. 대신 문제에 대한 나의 감정과 태도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불평하고 낙담하기보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다. 정신적 근육(mental muscle)이 강해져야 더 큰 도전을 할 수 있다. 자신의 감정을 훈련해야 한다.
여성을 억누르는 사회 분위기가 극심한 한국에서는 더더욱 여성의 리더십 트레이닝이 필수다. 스스로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다.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보는 훈련을 통해 심리적 장벽을 극복하고 자신감을 갖는 것이 핵심이다. 한국 여성들은 매우 똑똑하고 잠재력이 크지만 여전히 다소 수동적인 면이 있다. 자꾸 눈을 낮추고 남성에게 자신을 맞추려 한다. 좁은 한국 땅에 갇혀 국제적 시야가 부족하면 더욱 그렇게 고립된다. 세계로 나와보면 그게 문제임을 바로 알게 된다. 사회가 그렇게 만든 것이지만 그걸 깨고 나오는 것은 결국 자신의 과제다.”
◆보이는 것보다 ‘내실’을 키워라…“규모는 작게, 생산성은 높게”
“오늘처럼 TV 인터뷰가 있거나 하지 않으면 평소엔 화장도 하지 않고 꾸미지도 않고 다닌다. 지금도 활동적인 요가 레깅스와 스니커즈 차림으로 왔다. 파워숄더 재킷에 싸구려 꽃 장식 하나 달고, 사촌에게 빌린 목걸이를 한 것이 전부다.
보이는 것에 신경쓸 시간에 편의성과 실용성, 생산성 높이는 일에 집중하라. 디지털 변혁의 시대, 메타버스 시대에 접어든 지금은 명품 시장 등에서 실제로 여성이 경제적 리더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 기세를 몰아 여성들이 더욱 더 경제적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
젊은 세대는 이제 메타버스에서 다양한 정체성을 갖고 살아간다. 이를 힌트 삼아 ‘양보다 질’ 전략으로 가는 것이 현명하다. 규모의 게임을 하기보다 유니크한 틈새 시장을 노리는 것이 좋다. 이제 정보(database)가 새로운 연료가 되는 세상이다. 정보기술(IT) 인프라를 안팎으로 최대한 적용하고, 전통적인 백화점 입점 등보다는 아마존에서 직접 판매하는 매장을 운영하는 식이 나을 것이다. 모든 것이 온라인에 있으니 ‘셀프 러닝’을 하면 된다.
규모보다 생산성 싸움이 될 미래는 지금과 아주 다른 모습일 것이다. 기업을 키우는 것보다 더 큰 생태계를 만드는 것에 집중하라. 나와 비슷한 점이 있는 기업들과 협업하고, 확실한 포지셔닝을 하는 것을 뜻한다. 함께 생태계를 만들 기업들과 경쟁보다는 협업하는 것이 좋다.”
◆실력 쌓기·노력·역발상 통한 대담한 도전…“무엇도 기다리지 마라”
“우리는 남자가 만든 세상에서 일해야 한다. 특히 아시아 여성들은 조용하고 예의가 바른데, 이는 백인 서양 남성들에게 역량이 부족하고 자신감이 없는 것으로 오해를 받는다. 한 마디로 조언한다면 ‘무엇도 기다리지 마라’고 하겠다. 누군가 해 주기를 기다리기 전에 무엇이든 시도하며 경험을 쌓는 것이다. 유명 쇼핑몰에 입점을 못 하던 초기에는 ‘지하 귀퉁이 한 코너라도 주면 증명해 보이겠다’고 하며 끈질기게 자리를 요구했다.
MCM에서 명품 브랜드 최초로 백팩을 개발했을 때도 다들 미쳤다는 반응이었다. 나는 이제 ‘이동성(mobility)’의 시대가 왔으니 두 손이 자유로운 백팩이 먹힌다고 생각했다. 중국 시장에 이를 알리고 싶었는데 이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당시 인기 K팝 스타였던 비에게 백팩 협찬을 했다. 전략은 대성공이었고, 프랑스 파리에서도 MCM 백팩을 멘 중국인들을 엄청나게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정신은 ‘절대 울지 마라(Never Cry)’이다. IMF 금융 위기 때 모든 것을 팔고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해야 하는 위기 순간이 왔다. 앉아서 울기보다 뭐라도 하자고 생각했고, 한국이 위기에 빠진 이때 오히려 세계 무대로 가자고 역발상을 했다. 스스로도, 주변의 그 누구도 될 거라 믿지 않았지만 패션유통업에 대한 노하우는 있었기 때문에 베팅해 본 것이었다. MCM 라이센스 사업자로서는 잘 하고 있었기 때문에 향후 10년간 브랜드를 키워갈 자신이 있었고, 문을 두드렸다.”
◆인정욕구를 버리고, 두려움에서 빠져나올 것…“불안의 97%는 일어나지 않는다”
“다른 이를 설득하거나 인정받으려고 할 필요 없다. 나도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애썼던 시기가 있지만 결국 그보다는 나만의 방식과 영역에 몰두해 노력하는 길을 택했다. 아버지의 가부장적 태도는 그가 자라온 환경과 맥락에서 자연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이를 바꾸거나 맞서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나는 나의 맥락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면 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나를 낙담시켰던 아버지와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이해에서 비롯됐다.
또한 내가 처한 상황에서 빠져나와서 바라보면 두려움을 다루기가 좀 더 쉬워진다. 나 역시 인간이라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패닉에 빠지기보다 명상을 많이 한다. 조사에 따르면 97%의 불안은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고 한다. 2%는 일어나더라도 대처할 수 있는 정도이고, 나머지 1%는 어차피 신에게 맡겨야 하는 영역이다. 그렇다면 왜 걱정을 하나. 운다고 바뀌는 건 없다. 나는 문제가 생기면 사회·경제학적으로 내가 무엇을 시도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여성 리더십’은 그릇이 더 크다…“남성이 만든 세상에 순응하지 말 것”
“나의 신념이자 경영철학은 ‘봉사하기 위해 성공한다(Succeed to serve)’이다. 여성 리더십은 자신이 수혜 입은 것을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는 기본적인 인식이 있다. 남성은 그 반대다. 그들은 ‘성공하기 위해 봉사(Serve to succeed)’한다. 다양성을 포용하고 부패 및 각종 인습으로부터 투명하며, 공동체적 인식을 기반에 둔 여성 리더십의 차별성은 지금 시대에 더 경쟁력 있고 적합한 가치를 제공할 수 있다. 남성의 질서나 방식을 따라하지 마라. 또한 여성들은 남성 사회가 원하는 대로 살 필요가 없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CVO로서 비전을 따라갈 수 있는 비결은 ‘사업의 목표가 무엇인지’ 명확히 아는 것이다. 개인적 차원의 영달이 아닌 사회에 돌려주기 위한 성공을 한다는 목표가 있기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내 삶을 세 단계로 구분하자면 30세까지는 공부를 했고, 이후 60세까지는 열심히 일하고 발전을 거듭했다.
이제 3기를 시작했는데 다음에 무엇을 할까보다는 ‘다음 세대를 위해 어떻게 길을 닦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단계다. 내가 성취한 것을 사회에 어떻게 나눌지 생각하는 것이다. 비즈니스 차원에서는 기업공개(IPO)를 타진하고 있으며, 개인적 목표는 북한에 가서 의료·교육 관련 지원을 하는 것과 여성 임파워링을 더 열심히 하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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