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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마을 촌놈'에서 연극·뮤지컬공연계 거목된 박명성 [나의 삶 나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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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8-03 06:00:00 수정 : 2022-08-03 14: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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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시절 차범석 연극 ‘산불’ 보고 전율
‘김상열 사단’에서 연극배우의 꿈 키워
얼마못가 자질부족 깨닫고 연출가 길
첫 연출맡은 ‘동물농장’서 쓰라린 경험
다시 연극→뮤지컬 기획자로 변신 거듭

국내 첫 브로드웨이 라이선스 뮤지컬
‘더 라이프’ 들여와 환란 중 흥행몰이
美서 ‘신뢰할 만한 프로듀서’ 인정받아

“나만큼 성공, 실패 경험한 사람 없을 것
실패 땐 수업료 내고 공부했다 생각해
제작시스템·배우 기량은 세계적 수준
콘텐츠·무대장치·조명 등 취약 아쉬워”

‘땅끝 마을’ 해남 출신 촌놈은 광주로 유학을 간 고등학교 시절 차범석(1924∼2006, 극작가·연출가) 연극 ‘산불’을 보고 전율을 느꼈다. ‘연극쟁이’가 되기로 마음먹은 순간이다. 그렇게 어찌어찌하여 입대 전, 당대 연극계를 주름잡았던 ‘김상열(1941~1998, 〃) 사단’에서 본격적으로 연극배우 꿈을 키웠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배우자질이 없다는 걸 깨닫고 연출가의 길로 방향을 틀었다. 이후 군 복무 기간 3년을 빼고 몇 년간 조연출로 극단 허드렛일을 도맡던 중 1989년 첫 연출 기회가 왔다. 당시 2년 전 서울 대학로에 극단 ‘신시(神市)’를 창단한 김 연출이 단원 워크숍 작품 연출을 맡긴 것이다. 그동안 갈고닦은 기량을 인정받고, 잘하면 정식 연출로 데뷔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의욕적으로 최선을 다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선보였다. 결과는 김 연출 한마디로 정리됐다. “연출은 만만한 작업도, 아무나 하는 것도 아니야. 농사를 짓든지 기술을 배우는 게 낫겠어. 배우는 텄다 싶어서 연출을 시켰더니 그것도 젬병이군. 이걸 연극이라고 만들었어?”

국내 1세대 뮤지컬 제작자이기도 한 ‘연극쟁이’ 박명성 프로듀서는 해외 뮤지컬 라이선스 계약문화 정착과 선진 뮤지컬 제작시스템·국내 뮤지컬 첫 표준계약서 도입 등 뮤지컬 발전과 전성기를 이끌었다. 박 프로듀서가 지난달 27일 서울 서초구 신시컴퍼니에서 인터뷰 도중 포즈를 취하고 있다. 허정호 선임기자

어떻게든 연극판에 남고 싶었던 그는 김 연출을 찾아가 “기획자(프로듀서) 일을 하면 어떻겠냐”며 매달렸다. 이에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에게 제격인 일이다. 넌 훌륭한 기획자가 될 수 있을 거야”라고 북돋워 준 김 연출의 대답은 빈말이 아니었다. 촌놈은 ‘신시’ 대표였던 김 연출 작고 직후 극단을 책임지면서 국내 뮤지컬 발전과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리고 중·대극장 연극 확대 등 공연문화 트렌드를 확 바꾼 선구자가 됐다. 박명성(60) 신시컴퍼니 프로듀서 이야기다. 땅끝 마을 촌놈에서 연극·뮤지컬 공연계 거목이 된 그를 지난달 27일 만났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 신시컴퍼니 사무실에서다. 한쪽 벽에 걸린 ‘세상에 없는 무대를 만들다’는 붓글씨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좌우명 ‘가장 낮은 곳에서 먼 꿈을 꾸는 사람’답게 스스로 거는 주문같았다. 신시컴퍼니가 6년 만에 국립극장 대극장(해오름)에 다시 올린 연극 ‘햄릿’ 얘기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한 달 일정으로 지난달 13일 시작한 ‘햄릿’은 출연진 중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와 16일부터 공연이 취소됐다가 인터뷰 전날 재개됐다.

―한 달 동안 전회 매진돼도 제작비를 회수하기 쉽지 않다던데 타격이 크겠다.

“할 수 없다. 앞을 내다보기 힘든 어려운 환경 아닌가. 방금 전 손진책 선생님(‘햄릿’ 연출)과 통화했는데 ‘더블 캐스트를 할걸 그랬다’고 아쉬워하셔서 한말씀 드렸다. ‘더블 캐스트를 했으면 이렇게 완성도 높은 공연이 나왔을까요.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게 목표지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저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라고. 지금은 코로나19 상황이라 어쩔 수 없지만 나는 항상 ‘원 캐스트’를 주장한다. 주요 배역마다 맡는 배우가 한 명(원 캐스트)인 것과 여러 명(더블·트리플 캐스트 등)인 경우 연습량과 작품 완성도 차이가 크게 나니까. 또 연극으로 수익이 나면 얼마나 나겠나. 그냥 훌륭한 선생님(대배우)들 모시고 좋은 작품을 관객들에게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지.”

박 프로듀서가 그동안 성과를 인정받은 각종 트로피가 진열된 사무실에 선 모습. 허정호 선임기자

―국내 1세대 뮤지컬 제작자로서 ‘뮤지컬계 미다스 손’으로 불리는데 정작 본인은 ‘연극쟁이’를 입에 달고 산다. 연극판에 어떻게 발을 디뎠나.

“1962년(호적상으론 1963년) 전남 해남에서 농사 짓는 부모의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나 중학생 때까지 농사 일도 돕고 논두렁 밭두렁 오가며 자랐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 단체 관람을 가서 본 차범석 선생님 ‘산불’에 감동해 연극배우가 되고 싶었다. 서울예술대학에 가려 했지만 부모님 눈치에 전남대 상과대를 지원했고 낙방했다. 아무래도 은행원은 아닌 것 같아 상경해서 연기학원도 다니며 재수해 서울예대 연극과를 지원했지만 또 떨어졌다. 삼수 때는 ‘일단 입학한 뒤 연극과로 옮기자’는 생각으로 경쟁률 낮았던 서울예대 한국무용과(83학번)에 합격했다. 당시 숙소는 연구단원 생활을 하던 ‘극단 동인극장‘의 장충동 지하 소극장이었다. 극장에서 숙식하며 청소와 사무실 업무, 선배들 심부름 등 온갖 잡일을 할 때 유망 배우였던 김갑수(65) 형을 만났다. 내가 극장에서 지내는 걸 알고 얹혀살던 형님 집을 나와 쳐들어온 것이다. 형에게 라면 끓여주고 양말 빨아주며 2년 넘게 같이 지냈다. 나를 단역이나마 무대에 처음 세워주고, 김상열 선생에게 소개해준 게 갑수 형이다. 그 덕에 내가 ‘신시’ 창단 멤버가 되고 프로듀서가 될 수 있었다.”

―1989년 연출작 ‘동물농장’의 기억이 쓰라릴 듯한데.

“조연출 몇 년 했다고 연출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연출가는 연극적 지식과 예술적 소양은 물론 리더십과 배우 심리를 꿰뚫는 혜안 등 여러 가지를 갖춰야 하더라. 그래서 연출 잘하는 젊은 친구들 보면 천재라고 생각한다. 빨리 연출을 포기하고 다른 일(기획자)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준 김상열 선생에게 감사해야지.”

이후 극단 살림과 행정 업무를 총괄하며 홍보 마케팅 등 연극 기획자로 일한 그는 1997년 뮤지컬 기획자로 변신한다. 국내 관객들이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의 최신 뮤지컬이 아니라 30∼40년 전 작품만 봐야 하는 게 못마땅해서다. 이는 국내 제작사들이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은 채 브로드웨이 옛날 작품을 베껴 공연하는 ‘해적판’ 관행 탓이 컸다. 그는 다르게 해보려고 미국에 갔지만 한국 공연계의 괘씸한 행태와 제작 능력을 불신한 브로드웨이 관계자에게 문전박대당하기 일쑤였다. 그래도 기어코 설득해 들여온 국내 최초 브로드웨이 라이선스 뮤지컬이 ‘더 라이프’다. 1998년 공연 당시 외환위기였음에도 크게 흥행했고, 이를 계기로 ‘신뢰할 만한 한국 프로듀서’로 이름이 알려져 ‘렌트’, ‘시카고’ 등 브로드웨이에서 인기절정인 작품들만 선별해 계약을 따냈다.

―극단을 1999년 ‘신시뮤지컬컴퍼니’로, 다시 2009년 ‘신시컴퍼니’로 바꾼 이유는.

“연극, 뮤지컬, 마당극, 악극 등을 다 잘해낼 자신이 없었고, 뮤지컬이 머잖아 공연예술의 꽃이 될 거란 확신이 있어서 뮤지컬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다 제1회 차범석 희곡상(2007년) 작품인 ‘침향’을 맡아 2008년 공연하게 됐다. 나의 연극 정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이고 돌아가실 때까지 보필하며 많은 조언을 구했던 차범석 선생님께서 ‘다시 연극해라’고 주신 계시 같았다. 나도 평소 ‘연극과 뮤지컬이 균형 있게 발전해야 건강한 공연시장이 형성되고 문화강국이 될 것’이란 생각을 해왔고…. 연극 잘하는 팀이 뮤지컬도 잘 하는 만큼 둘을 균형 있게 제작하기로 하고 사명에서 ‘뮤지컬’을 뺐다.”

그는 이후 회사 대표 자리와 뮤지컬 부문도 후배들에게 믿고 맡기며 연극 프로듀서 일에 주력하는 연극쟁이로 돌아왔다. 신시컴퍼니는 흥행 뮤지컬 작품 수익으로 많은 제작비에 비해 수익성이 낮은 창작·실험적 뮤지컬, 대극장 연극을 꾸준히 올린다. ‘맘마미아’, ‘시카고’, ‘아이다’, ‘렌트’, ‘빌리 엘리어트’, ‘마틸다’ 등 흥행작도 많지만 박 프로듀서는 모두 라이선스 뮤지컬이라며 아쉬워했다.

―쪽박 차고 빚더미에 앉게 한 작품도 적지 않았는데, 특히 아픈 손가락은.

“조정래 선생의 대하소설 ‘아리랑’을 대표적인 창작 뮤지컬로 레퍼토리화하려고 했는데 안 돼 마음이 아프다. 제작비가 엄청난 뮤지컬은 (시즌제로) 계속 다시 해서 레퍼토리화했을 때 수익이 창출되는데, 재연 때 욕심을 내 너무 큰 극장(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올려 실패했다. ‘갬블러’도 마찬가지고. ‘댄싱 섀도우’는 차범석 ‘산불’을 세계적 수준의 창작 뮤지컬로 만들려고 해외 최고 예술가들하고 협업했다가 오히려 우리 고유 토속적 정서를 희석하며 관객 호응을 얻지 못했다. 자만했던 결과여서 항상 반성한다.”

―흥행 참패로 집 전세금 털어 쓰고 신용카드도 정지된 초창기 시절 등 최악의 상황에 놓여도 긍정적 모습이 인상적이다.

“속이 없어서 그렇다.(웃음) 나만큼 대형 뮤지컬에서 성공하거나 실패해 본 사람도 없을 거다. 같은 일을 하는 이상 언제든 더 큰 실패를 할 수 있는데, 그 전에 비싼 수업료 내고 엄청난 공부 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실패할 때마다 머리 싸매고 자책하며 스스로를 학대하면 자기 심신만 상할 뿐 앞으로 나갈 수 없잖나.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신시컴퍼니의 경영 철학은.

“좋은 작품을 계속 만들어내는 자생력을 갖추는 것이다. 최고 작품성과 완성도로 승부를 거는 게 신시 경쟁력이다. 외부 투자와 특정 스타 캐스팅·마케팅을 멀리하고, 공정한 오디션 과정을 거쳐 가급적 원 캐스트로 작품을 올리는 이유다.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 빌리 할머니를 한 박정자(80) 선생님도 해외 오리지널팀 앞에서 오디션 보고 뽑혔다. 작품의 질이 뛰어날 수밖에 없다.”

―한국 뮤지컬 경쟁력은 어떤가.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제작 시스템과 배우 기량은 세계적 수준인데 연출·극본·작곡·안무 등 콘텐츠 분야와 대형 무대 장치·조명·디자이너 등 기술 분야 인재층이 취약하다. 이런 문제가 좀 해결되고, 뮤지컬 전문 배우들을 스타로 육성하면 창작 뮤지컬도 세계적 수준이 될 수 있다. 더는 라이선스 뮤지컬에 의존해선 안 되는 시대다. 우리 관객들에게 오래도록 사랑받는, 대한민국을 대표할 만한 창작 뮤지컬 한두 편 만들고 은퇴하는 게 꿈이다.”

 

박명성 프로듀서는… ●1962년 해남 출생 ●광주 서석고·서울예술대학 한국무용과 졸업, 단국대 연극영화 학사·대중예술 석사 ●1987년 극단 ‘신시’ 창립단원 ●1999∼2011년 신시(뮤지컬)컴퍼니 대표이사 ●2004∼2006년 한국공연프로듀서협회 회장 ●2007∼2009년 서울연극협회 회장 ●2015년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 개·폐회식 총감독 ●2015~2016년 한국뮤지컬협회 이사장 ●2012년 옥관문화훈장 ●2014년 제24회 이해랑 연극상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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