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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포럼] 윤석열 외교 100일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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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8-17 23:04:57 수정 : 2022-08-17 23: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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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미 행보에도 펠로시 패싱 오점
中 사드 겁박 한·중 관계 살얼음
일관성 훼손, 입지 약화 우려도
외교 자율성 키워 실리 찾아야

1895년 3월 청나라 실력자 리훙장은 73세의 노구를 이끌고 바다 건너 일본의 항구 도시 시모노세키로 향했다.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 8개월여 동안 이어진 청일전쟁을 끝낼 담판을 하기 위해서다. 청군은 아산 앞바다 풍도와 천안, 평양에서 처참하게 무너졌고 최정예 북양함대마저 산둥반도 앞바다에서 궤멸한 후였다. 리훙장은 이토가 단골로 찾아가는 복요리 전문 요정을 찾아야 했고 길거리에서 날아든 총알로 얼굴을 다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사실상 조선의 지배권을 일본에 넘기는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됐다. 이 조약은 “청은 조선이 완결 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하며”로 시작되며 천문학적인 배상금과 랴오둥 반도 등 영토 할양이 담겼다.

127년이 흘러 중국 수도 베이징에서 1000㎞나 떨어진 칭다오에서 비슷한 풍경이 연출됐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지난 9일 이곳으로 박진 외교부 장관을 불러 “양국 국민의 최대공약수”라며 “마땅히 해야 할 5개항(5個 應當)을 견지해야 한다”고 겁박했다. 첫 조항이 “독립자주 노선을 견지해 외부 간섭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주도의 공급망 가입 불가, 대만 문제 언급 금지 등을 암시하는 말이 뒤따랐다. 다음 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과거 한국 정부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3불(사드 추가 배치 불가, 미국 미사일방어체계 불참, 한·미·일 군사동맹 불가)·1한(사드 운용 제한) 정책 선서를 했다”며 “새 관리는 과거의 부채를 외면할 수 없다”고 협박했다. 중국이 과거 일본에 당했던 굴욕을 한국에 강요하는 치졸한 행태가 아닌가.

주춘렬 논설위원

중국이 돌연 윤석열정부에 모욕적 발언을 쏟아내고 2017년 사드 갈등 봉합 후 잠잠했던 사드 카드까지 꺼낸 이유는 뭘까. 윤 정부의 외교 난맥상이 화를 자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의 권력 서열 3위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지난 3일 한국을 찾았는데 정부는 대통령 면담을 놓고 다섯 차례나 말을 바꾸며 오락가락했다. 윤 대통령이 “휴가로 만나지 않는다”고 했다가 “조율 중”이라고 하더니 재차 “만날 일이 없다”고 번복했다. 결국 전화 통화를 했는데 “국익을 고려한 결정”이라고 군색한 변명을 댔다. 중국 눈치 보기를 빼곤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펠로시 면담 불발은 윤석열 외교의 일관성에 흠집을 냈다. 윤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을 만나 한·미동맹을 다졌다. 지난 6월 말 스페인 마드리드로 달려가 중국을 ‘도전’으로 규정한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중국을 통한 수출 호황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최상목 대통령실 경제수석)는 말까지 나왔다. 그런데 펠로시 패싱 탓에 한국 외교의 ‘블러핑’이 들통났다. 중국 외교가 이런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든 것이다.

사드 대응도 신통치 않다. 대통령실은 “사드가 안보 주권이고 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전 정부의 입장과는 다르다”고 응수했다. 정권마다 진폭이 있다지만 기조 자체를 바꾸는 걸 중국이 수용할 리 만무하다. 외려 자중지란의 민낯만 드러낸 꼴이다.

중국은 사드 추가 배치나 ‘칩4’ 동맹 참여 때 경제 보복을 강행할 게 뻔하다. 수교 30년을 맞아 한·중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그렇다고 지레 중국의 보복을 겁낼 이유는 없다. 한국의 반도체 없이는 중국 산업도 큰 타격을 받는 만큼 경제 전쟁이 전면화하지는 않을 듯하다. 하지만 요소수처럼 민생 관련 제품과 희토류·리튬 등 첨단소재 금수 조치에 대해서는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

윤 대통령은 수차례 세계시민까지 거론하며 글로벌 중추 국가로 거듭나겠다고 했다. 하지만 100일간 외교현장에서 실수가 잦았고 컨트롤타워 실종, 전략·전술 부재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 미·중 사이에 끼인 한국은 사안마다 선택을 강요받겠지만 국익을 기반으로 자유와 평화, 인권을 추구하는 원칙이 흔들려서는 안 될 일이다.

구한말 국제 정세에 어둡고 무기력했던 조선은 열강의 각축장으로 전락하며 망국의 길을 걸었다. 외교안보팀의 깊은 성찰과 각성을 촉구한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 않던가.


주춘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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