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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오기에 신원 바뀐 채 해외로… 핏줄찾기 ‘산 넘어 산’ [심층기획-한인 입양인들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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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9-13 06:00:00 수정 : 2022-09-13 09:5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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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KRG, 해외입양인 단체 최초로 진실화해위 조사 신청

독재정권 시절 막무가내 입양 빈번
고아 기록됐지만 부모 생존하기도

친부모 동의 없으면 정보공개 못해
최근 6년 9022건 중 1819건만 허용

공적기관 책임 강화한 헤이그협약
기준 못 맞춰 9년째 비준 불가 상황
한국에서 태어난 베티나 마르쿠센(48)씨는 유신정권 시절이던 1974년 생후 6개월에 덴마크로 입양됐다. 마르쿠센씨의 입양 길은 시작부터 순탄치 못했다. 마르쿠센씨의 양부모가 받은 입양 서류엔 마르쿠센씨가 건강하고 영양상태도 양호하다고 적혀 있었지만, 공항에서 만난 마르쿠센씨의 상태는 달랐다. 겉으로 보기에도 영양실조 상태였고, 온몸엔 물집과 종기가 잡혀 있었다. 덴마크 병원에선 마르쿠센씨가 ‘일본 뇌 수막염’에 걸렸다고 진단했다. 영구적인 뇌 손상을 일으킬 수 있어 아이에게 치명적인 질병임에도 당시 한국 입양기관은 이 사실을 숨긴 채 해외입양을 보낸 것이다. 마르쿠센씨는 3개월을 병원 중환자실에서 보내고서야 건강을 간신히 회복할 수 있었다.
홀트아동복지회 창립자인 해리 홀트가 1955년 미국으로 입양을 보낸 전쟁고아 8명의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

마르쿠센씨는 “당시 양어머니가 매우 놀라 입양기관에 전화하니 입양기관에선 ‘걱정하지 말라. 아이가 죽으면 다른 아이를 보내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며 “양어머니가 공항에서 나를 기다릴 때 입양하기로 한 아이를 만나지 못한 부모도 있었다고 전해 들었다”고 했다.

마르쿠센씨의 사례는 과거 체계 없이 무분별하게 진행됐던 해외입양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입양기관이 입양아동의 출신지나 나이 등을 입양 서류에 허위로 기재하는 일이 빈번했다.

‘고아 수출국’이라는 오명을 얻은 한국 정부가 해외입양 문제를 두고 새로운 갈림길에 섰다. 덴마크 해외입양인으로 구성된 ‘덴마크 한국인 진상규명그룹’(DKRG)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조사 신청서를 제출하면서다. 해외입양인으로 꾸려진 단체에서 정부 측에 공식적으로 조사를 의뢰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덴마크 외 미국·벨기에·네덜란드 등에 입양된 이들도 조사 신청서를 함께 제출하기로 한 만큼 진실화해위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관심이 쏠린다.

 

◆DKRG “해외입양 과정서 인권침해 발생… 정보 접근도 제한적”

지난달 23일 오전 11시, DKRG 공동대표인 덴마크 변호사 피터 뮐러(한국명 홍민·48)씨가 서울 중구 진실화해위 건물에서 기자들 앞에 섰다. ‘독재정권 시절 해외입양의 인권침해 문제 등에 대한 조사를 개시해달라’는 신청서를 진실화해위에 제출하고 난 직후였다. 이번 신청엔 DKRG 회원 175명 중 53명이 참여했으며 나머지 회원들은 순차적으로 조사 신청서를 제출할 계획이다. 뮐러씨는 이 자리에서 “그동안 거짓을 바탕으로 살아온 해외입양인이 진실을 알 권리가 있음을 선언한다”며 “정체성과 알 권리를 박탈당한 수천명 입양인에 대해 진실화해위가 적극적으로 조사하기를 요청한다”고 말했다. 이어 “해외입양과 관련해 홀트아동복지회 등 국내 입양기관에 보관돼 있는 입양 서류 원본의 완전한 공개를 요구한다”고 덧붙였다.

DKRG가 진실화해위에 조사 신청서를 제출한 건 독재정권 시절 이뤄진 해외입양의 여러 문제점들을 명명백백히 밝히고, 해외입양인들이 성인이 돼 한국으로 돌아와 생물학적 부모를 찾을 때 겪는 어려움들을 타개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과거 해외입양 과정에서 인권침해가 빈번하게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입양 서류상 출생지와 나이 등이 잘못 기록돼 있는 경우 △고아라고 기록돼 있지만 실제로는 생물학적 부모가 버젓이 살아 있는 경우 △입양인이 다른 입양인의 신원을 갖고 입양된 경우 등이 많았다는 것이다.

뮐러씨 역시 입양 서류엔 ‘서울 태생 고아’로 기록돼 있지만 알고 보니 고아가 아니었던 경우다. 입양기관 등을 통해 확인해본 결과, 뮐러씨의 고향은 서울이 아닌 충남 논산이었고, 입양 당시 친모도 살아 있었다고 한다. 뮐러씨는 “입양 서류에 고아로 기록돼 있었지만 저는 고아였던 적이 없다”고 토로했다.

이 때문에 생물학적 부모를 찾는 일은 어려움의 연속이다. 해외입양인들은 가장 큰 장애물로 ‘정보에 대한 접근’을 꼽는다.

해외입양인은 가장 먼저 아동권리보장원에 정보공개 청구를 해야 한다. 청구를 접수한 보장원은 입양인의 입양 서류에 기재돼 있는 부모에게 연락해 “만날 의향이 있느냐”고 묻는다. 여기서 부모가 거부하거나 응답하지 않으면 입양인은 정보를 받을 수 없다. 현행법이 ‘친생부모의 동의를 얻어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어서다.

더불어민주당 김성주 의원이 아동권리보장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입양인의 친생부모 정보공개 청구 결과’ 자료를 보면, 2016년부터 지난해 5월까지 해외입양인이 청구한 9022건 중 부모의 동의를 받은 건 1819건(20.2%)에 불과했다. 생물학적 부모에 대한 정보를 요청한 해외입양인 5명 중 1명만 자신의 핏줄에 대한 정보를 받는 셈이다.

홀트아동복지회가 1956년 12월 해외입양을 위해 띄운 미국행 전세기의 내부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

◆헤이그 협약 9년째 비준 못한 정부

전문가들은 이제는 정부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정부는 지금껏 해외입양에 대한 진실규명과 문제 해결에 소극적 태도로 일관해왔다. 아동 중심의 입양을 지향하는 ‘헤이그 국제아동입양 협약’을 아직 비준하지 않은 것은 해외입양에 대한 정부의 마음가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헤이그 협약은 국가기관 등 공적기관이 입양 과정 전반을 책임지도록 하는 게 핵심이다.

헤이그 협약엔 전 세계 101개국이 가입해 있는데, 한국은 2013년 서명을 해놓고도 입양 체계를 협약 기준에 맞추지 못해 9년째 비준을 하지 못하고 있다.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선 정부가 입양 과정 전반을 주도하도록 한 입양특례법 개정안 등이 국회에서 통과돼야 하는데, 아직 소관위에 머물러 있어 제대로 된 진행이 되지 못하고 있다.

해외입양 문제에 천착해온 이경은 국경너머인권 대표는 “한국이 헤이그 협약을 비준하지 않고 있는 건 해외입양을 정부가 해결해야 할 사안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라며 “(비준하지 않으면) 국제사회의 압박을 안 느낄 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현 상황을 유지하고 있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이상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희진 기자 he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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