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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책임 인정…"기지촌 양공주? 이제 나도 대한민국 국민"

입력 : 2022-10-12 14:49:17 수정 : 2022-10-12 14:4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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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촌 미군 위안부 피해자들 "대법 판결 환영"
"판결금보다 국가 잘못 인정 자체가 더 값지다"
"국민 한 사람으로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겠다"

"기지촌에서 일하니까 '양공주'라고 부르면서 안 좋은 눈초리로 보는 사람이 많았어요. 지금도 그런 시선이 있지만, 이젠 괜찮아요. 나라에서 잘못했다는 게 인정됐잖아요. 이제 나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 있는 동안 사람답게, 우리나라 여성답게, 보통 할머니답게 살고 싶어요."

 

12일 경기 평택시 팽성읍 햇살사회복지회에서 만난 김숙자(78) 할머니는 기지촌 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결과에 대해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18살부터 50년 넘게 안정리를 비롯해 기지촌을 돌아다니며 '미군 위안부'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왔다.

 

지난달 29일 대법원은 김 할머니 등 95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상고심에서 국가가 성매매를 방조한 것이 인정된다는 취지의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확정했다.

 

강제격리 경험이 있는 74명에게는 1인당 700만 원씩, 강제격리 경험이 없는 43명에게는 1인당 300만 원씩 국가가 배상하라는 판결이다.

 

재판부는 국가가 단순히 기지촌 내 성매매를 방치·묵인하거나 최소한의 관리를 한 것이 아니라 애국교육·성병치료 등을 통해 적극적·능동적으로 외국군 상대 성매매를 정당화하거나 조장했다고 판단했다.

 

외국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성매매 활성화를 통해 외화를 획득한다는 의도로 기지촌을 운영·관리했다고 인정한 것이다.

 

당시 정부는 미군에게 더 나은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성병진료소·성병관리소를 설치했고, '전염병예방법'에 따라 '위안부'는 주 2회 성병검진을 받도록 했다. 또 '토벌'로 불리는 미군·경찰·보건소 합동단속이나 성병에 걸린 미군이 여성을 지목하는 '컨택'에 의해 성병관리소에 수용돼 강제 검진과 치료를 받았다.

 

김 할머니는 "옛날 생각이 많이 난다. 식모살이 하면서 돌아다니다 만난 애들이랑 18살에 송탄 기지촌에 처음 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평생 기지촌에서 살았다"라고 말했다.

 

이어 "당시 기지촌에는 그곳만의 규칙이 있었다. 회비도 있고, 보건증 같은 패스도 만들어야 했다. 일주일에 두 번씩 성병검사 해야 하고, 3개월마다 혈액검사하고, 6개월마다 결핵 검사도 했다"며 과거를 회상했다.

 

김 할머니는 판결금 수백만 원이 큰돈이지만, 판결금보다 국가의 잘못을 인정한 판결 자체가 더 값지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스스로 갇혀 있었다. 나라에서 시켜서 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숨어 살았다. 손가락질 받으면서 살았다. 그런데 국가가 우리를 관리하고 했던 게 인정됐다. 그게 제일 좋았다. 판결 나고 너무 기뻐서 막 소리를 지르고 싶었는데 거기서 그러지 못하고 나와서 환호성을 질렀다"라고 말했다.

 

또 "앞으로 길어야 10년 살려나 모르겠는데,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아가겠다"라고 덧붙였다.

 

당초 평택 안정리 기지촌 여성 37명이 소송에 참여했지만, 8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면서 14명이 세상을 떠났다. 피해 사실을 알리고, 함께 하자고 마음먹었던 원고는 23명만 남았다.

 

김 할머니는 "이 좋은 소식 듣지도 못하고 먼저 간 사람들이 너무 불쌍하고 안 됐다. 먼저 가서, 하늘나라에서도 좋은 결과 나왔구나 하고 좋아해 줄 거라 생각한다. 같이 기뻐하고 춤추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해 많이 아쉽다"라고 했다.

 

전날 오전에는 팽성읍행정복지센터에 10여 명의 할머니들이 모였다. 판결금 수령을 위한 서류 준비가 어려운 할머니들을 돕기 위해 햇살사회복지회 봉사자들이 마련한 자리다.

 

이 자리에서 한 할머니는 "이겼다고 하니 기분이 좋지, 말해 뭐해. 우리를 위해 노력해준 분들께 고마울 뿐"이라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또 다른 할머니는 "6·25 전쟁 때 엄마,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린 나이에 혼자 떠돌다 기지촌에 왔다. 예전에 고생한 건 말도 못 한다. 그걸 어떻게 다 입으로 말하겠나"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우리 같은 사람이 있다는 걸 나라에서도 인정 안 해줄 때 얼마나 슬펐는지 모른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좋은 결과가 나와서 다행이다"라고도 했다.

 

반면 법원이 국가의 잘못을 인정하는 판결에도 여전히 세상의 시선이 두려운 이들도 있었다. 한 할머니는 "지금도 예전 생각만 하면 가슴이 무너지고 처참한 기분이 든다. 비록 우리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왔어도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는 걸 안다. 아직은 숨고 싶어진다. 앞으로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한다"며 말을 아꼈다.

 

기지촌여성인권연대를 구성하고, 수년 동안 기지촌 할머니들을 위해 애써온 우순덕 햇살사회복지회 대표는 이번 판결을 "국가가 미군을 위해 기지촌을 조성하고 관리했다는 점을 법원이 인정한 데 의미가 있다. 할머니들이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것"이라고 평가했다.

 

우 대표는 기지촌 여성들을 위해 나선 이유를 묻자 "필요하니까"라고 말했다. 그는 "옛날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아 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소송에 참여하지 못한 분들이 있다. 승소한다는 확신이 없으니 무작정 할머니들을 참여하시게 할 수도 없었다. 당시에는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냐'는 인식이 많았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더 최선을 다하려고 애썼다"라고도 했다.

 

이어 "쉽지 않았다. 그래도 함께하는 사람들 마음속에 '이건 꼭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 마음이 공유된 사람들끼리 뭉쳐서 함께할 수 있었다며 "대법 판결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앞으로 기지촌 여성 인권 문제를 어떻게 공론화해서 나아갈지 그 문제를 더 의논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우 대표는 경기도의 '기지촌여성 지원 등에 관한 조례' 이행을 촉구했다. 그는 "어렵게 조례를 제정했지만 이들을 위한 지원이 없는 상황이다. 판결이 안 났다, 상위법 없다 등 이유를 대왔다. 이제 대법 판결이 났으니 할머니들이 생전에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루 빨리 실질적인 지원을 하길 바란다"라고 덧붙였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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