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로 제도 허점 드러나
모호한 지역축제 규정도 명확화
의원실마다 관련 법안 보완 나서
尹 “자발적 행사 대책 마련해야”
국가애도기간 도어스테핑 중단
‘이태원 압사 참사’의 배경 중 하나로 행정당국의 ‘소극 행정’이 지적받고 있다.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재난안전법)에 따라 정부는 ‘안전관리 매뉴얼’을 두고 있지만, 이번 참사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이번 사태는 주최자가 명확하지 않으면 안전은 방치되기 쉽다는 사실이 증명된 사례다. 이 때문에 국회에서는 의원실마다 이번 참사를 계기로 재난안전법 보완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축제와 같은 시민 여가 생활에 자칫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통제가 심해질 수 있다는 부작용 지적도 있는 만큼 법안 보완 과정에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다.
31일 국회 등에 따르면 여야는 ‘재난안전법 66조의11’을 어떻게 개선할지를 놓고 고민중이다. 이 조항은 지역축제 개최 시 안전관리 조치에 대한 내용이다. 이 조항에 따르면 안전관리 적용 대상은 순간 최대 관람객이 1000명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하는 지역축제 등이다. 하지만 ‘지역축제’의 정의는 담지 않았다. 아무리 많은 인파가 몰리고 안전 우려가 있어도 지자체장이나 행안부가 지역축제로 판단하지 않으면 책임을 빠져나갈 수 있다.
현행법과 시행령하에서도 당국이 ‘적극 행정’에 나서면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공직 사회를 움직이려면 제도화를 통한 예방 조치가 최선이라는 의견도 적잖다. 핼러윈뿐 아니라 크리스마스 등 기념일에는 서울 시내 주요 거점에 인파가 몰리는 만큼 사고는 언제든 재발할 수 있어서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세계일보와 통화에서 “주최자가 없는 행사일지라도 안전관리를 제대로 하려면 일정 인원 이상이면 지자체나 경찰, 소방이 나서서 조치할 매뉴얼을 만들어주는 것이 좋다”며 “‘단위면적당 몇 명 이상 모일 시’ 등을 규정할 수 있다. 각종 논문에 따르면 ㎡당 6∼7명이 모이면 혼잡한 공간이라고 해서 넘어짐이나 충돌 현상이 발생하는데 그런 것도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소개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관계자는 통화에서 “주최자가 없을 때 불분명한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이긴 한다”면서도 “다만 아직 사고 원인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아니어서 1일 관계 부처 현안보고를 들은 뒤 법안 발의 여부를 판단하려고 한다”고 귀띔했다.
지자체뿐 아니라 경찰에서도 주최자가 불분명한 다중 인파 안전 매뉴얼이 없는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경찰청 관계자는 “주최 측이 없는 다중 인파 사건에 대응하는 관련 경찰 매뉴얼은 없다”며 “주최자가 있다면 사전에 유관 기관이 역할을 분담해 체계적으로 대응한다. 이번 사고는 그런 부분에서 미흡한 점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경찰이 당초 예고한 200명이 아닌 137명만 배치한 것도 논란이다.
이와 관련해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한덕수 국무총리 등과 진행한 확대 주례회동에서 “주최자가 없는 자발적 집단 행사에도 적용할 인파 사고 예방 안전관리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이재명 부대변인이 전했다. 윤 대통령은 “지자체가 최소한의 안전 조치와 차량, 인원 통제를 경찰에 협조 요청하고, 경찰도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지자체에 긴급 통보하는 시스템에 대해 (앞으로)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윤 대통령은 국가애도기간 동안 출근길 약식 인터뷰(도어스테핑)를 하지 않기로 했다고 김은혜 홍보수석이 전했다.
◆또래 2030… 핼러윈 사탕 대신 국화 든 꼬마… 끝없는 추모
‘이태원 압사 참사’가 발생한 지 3일째인 31일 서울 곳곳엔 희생자의 명복을 비는 합동분향소가 마련됐다. 희생자가 집중된 20대와 30대부터 노년층, 어린아이들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전국 각지에서 기차 등을 타고 분향소를 찾았다. 시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하늘에서 못다 핀 꽃을 피우기 바란다”고 애도했다. 일부는 “지방자치단체나 정부가 제대로 통제해 대형 참사를 막았어야 했다”며 울분을 쏟아내기도 했다.
서울시는 이날 중구 서울광장을 비롯해 25개 자치구에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분향소를 차렸다. 이날 오후 5시까지 서울광장을 포함한 서울 지역 분향소에는 9377명이 다녀간 것으로 집계됐다. 분향소는 국가애도기간인 5일까지 운영한다. 전국 17개 시·도도 합동분향소를 마련했다.
서울광장 합동분향소엔 아침 일찍부터 시민의 조문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연차를 쓰고 분향하러 온 직장인, 휴가 나온 군인, 자녀 손을 잡고 온 가족 등 많은 시민이 국화로 가득 찬 분향소 앞에서 헌화하고 묵념하며 희생자를 추모했다. 서울 내 대표적인 업무지구로 꼽히는 광화문이 근처인 만큼, 직장인들도 점심시간을 이용해 분향소를 찾으면서 한때 대기 인원이 100명을 훌쩍 넘기도 했다.
희생자들과 나이가 비슷한 20대, 30대 시민의 조문 행렬이 줄을 이었다. 서울 강서구에서 온 김민영(21)씨는 “사고가 발생한 29일 낮에 이태원에 놀러가려고 했으나 당일 아침에 약속이 있어서 가지 못했다”며 “희생자들이 하늘에서는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있으면 좋겠다”고 애도했다. 이어 “기사를 보면 당시 경찰이 군중 통제보다는 마약 등 범죄 예방에 힘썼던 것 같다”며 “안전 대책이 미흡해서 벌어진 사고이니 안전 대책이 강화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남편과 함께 분향소를 찾은 A(32)씨도 “대한민국 번화가에서 이런 대규모 참사가 발생했다니 충격”이라며 “경찰은 주최자가 없는 대규모 행사였다고 하지만, 이태원 핼러윈 축제는 수년간 지속돼 왔다. 책임을 회피하기보단 앞으로는 인력을 배치해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가산동에서 용산구 합동분향소를 찾은 정재헌(24)씨도 “여기저기서 서로 책임 돌리기만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슬프다”며 직접 사들고 온 꽃을 헌화했다.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온 가족들도 눈에 띄었다. 8세 딸과 함께 분향소를 찾은 이모(41)씨는 “서울 출장이 있어서 어젯밤에 올라왔다가 일을 미루고 분향소에 들렀다”면서 “아이와 뉴스를 같이 보면서 사고에 대해 설명해줬고, 오늘 올 때는 ‘언니 오빠들 위로해주는 곳’이라고 말해주고 왔다”고 했다. 이씨 딸은 방명록에 ‘언니 오빠들 하늘에서 편히 쉬세요’라고 적었다.
손주뻘인 희생자들의 영혼을 기리러 온 60대와 70대도 많았다. 광주광역시에서 오전 5시에 출발해 서울광장을 찾은 송정희(70)씨는 “30일 새벽에 소식을 접하고 거짓말인 줄 알았다”며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해 죄스러운 마음”이라고 했다. 방명록에 ‘좋은 곳으로 가서 잘살라’고 적은 송씨는 이태원 분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70대 장향순씨도 “너무 어린 아이들이 꽃도 못 피우고 가는 게 슬퍼서 일찍 나왔다”며 “사고가 난 골목길을 잘 아는데 어떻게 그곳에서 사고가 날 수 있을까 싶다. 젊은 친구들이 간만에 놀려고 나갔을 텐데 그렇게 변을 당했다니 가슴 아프다”고 전했다.
정부의 미흡한 대처를 탓하며 울분을 토해내는 기성세대도 있었다.
최완석(68)씨는 “도저히 못 참겠다. 언제까지 이런 사고를 반복할 것이냐”며 “100명 넘는 이가 죽었는데 누구를 붙잡고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모든 걸 제쳐놓고 원인을 규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사고 당일 교통정리만 잘했어도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다들 말하지 않느냐”며 “과거에도 이런 일이 많았는데 언제까지 이럴 것인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었다. 김대일(69)씨도 “소식을 접하자마자 어안이 벙벙했다. 피어보지도 못하고 저버려서 마음이 먹먹하고 아프다”라며 “정부가 미흡했던 측면이 있지 않나 싶다. 우리는 아직도 안전불감증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대검찰청은 이날 전국 18개 검찰청이 서울 이태원 압사 참사 희생자 154명 전원의 검시 절차를 마치고 134명의 시신을 유족에게 인도했다고 밝혔다.
154명 중 여성이 99명, 남성은 55명이다. 연령은 20대 102명, 30대 31명, 10대 12명, 40대 8명, 50대 1명으로 집계됐다. 거주지는 서울(63명)과 경기(38명)가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서울시는 12월31일까지를 용산구 애도 기간으로 지정하고 모든 행사와 축제를 전면 취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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