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 월동지 日 이즈미 AI 영향
전 세계 개체 중 절반 넘게 몰려
市 ‘월동지 확보 시즌 2’ 마련
남은 전봇대도 내년까지 제거
“자, 하나-둘-셋 하면 같이 줄을 당겨주시면 됩니다. 하나-둘-셋.”
지난 11일 전남 순천시. 고즈넉한 한겨울 논밭이 시끌벅적해졌다. 비닐하우스에 굵은 밧줄을 메고 순천시 관계자들이 힘껏 잡아당기자 하우스는 후드득하고 쓰러졌다. 인근에 있는 나머지 하우스 6동도 조만간 철거될 예정이다.
멀쩡히 농사짓던 하우스를 철거하기로 한 건 ‘철새와의 공존’을 택한 순천만 주민의 ‘통 큰 결단’ 때문이다.
순천시는 1999년 순천만에서 월동 중인 흑두루미 80마리를 처음 확인했다. 흑두루미는 멸종위기 야생생물이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귀한 새다. 시는 겨울 추위를 피해 천 수백㎞를 날아오는 귀한 철새가 순천만에서 편히 쉬어갈 수 있도록 2009년 순천만 대대뜰 주변 전봇대 282개를 뽑고 62㏊를 보호구역으로 지정했다. 도시가 순천만으로 확장하지 못하도록 인근 35만평(1.2㎢)을 국가정원으로 조성하기도 했다.
이런 노력 덕에 순천만 흑두루미는 2002년 121마리에서 2009년 450마리, 최근엔 3000∼4000마리까지 증가했다. 늘어난 건 새뿐만이 아니다. 다른 지역에선 볼 수 없는 순천만 습지와 순천만 국가정원이 관광지로 인기를 끌면서 2011년 426만명이었던 관광객수도 2015년 768만명, 코로나19가 휩쓸기 직전인 2019년엔 1017만명으로 늘었다.
그런데 지난해 11월 말 순천만에 흑두루미가 갑자기 1만마리가량 몰려들었다. 전 세계 1만8000마리 남은 것으로 알려진 흑두루미가 절반 넘게 찾아온 것이다. 전문가들은 흑두루미의 최대 월동지인 일본 이즈미에서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AI)가 돌면서 1300마리가 폐사하는 등 서식 환경이 나빠지자 순천으로 ‘피난’ 온 것으로 보고 있다.
수용 한계를 넘긴 탓에 일부는 다시 일본이나 주변 시·군으로 날아갔지만 지난 12일 기준 5100여마리의 흑두루미가 순천만에서 겨울을 나는 중이다. 평년보다 25∼60% 많은 상황이다. 이날도 흑두루미가 무리 지어 쉴 새 없이 대대뜰을 드나들었다.
시는 철새 수용 능력을 확대하고, 한곳에 지나치게 몰리지 않도록 2009년 전봇대 철거를 잇는 ‘월동지 확보 시즌 2’를 마련했다. 흑두루미의 비행과 착지에 방해가 되는 비닐하우스 7동을 철거하고 내년까지 주변 전봇대 161개를 제거해 인안뜰 109㏊를 새 월동지로 조성할 계획이다. 2009년엔 ‘사람이 먼저지, 새가 먼저냐’며 전봇대 철거를 반대했던 주민들이 이번에는 먼저 보호지를 넓히자고 요구해왔다. 앞서 보호지로 지정된 대대뜰에서 농사는 짓되 볍씨를 거두지 않고 대신 ‘생태계서비스 지불제’(옛 생물다양성관리계약사업)로 미수확금을 받는 모델이 안착하면서 농민의 생계와 철새의 생존이 함께 갈 수 있다는 걸 체득한 덕이다.
이곳에서 매주 철새 개체수를 모니터링하는 이주현 전남대 동물행동생태연구실 박사는 “순천만의 서식 환경이 파괴돼 이곳을 찾는 흑두루미가 몰살하면 전 세계 흑두루미의 30%가 없어지는 셈”이라며 “취약종 보호에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이 뒤따르길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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