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부대 진중일지 시기·지역별 정리
중·일전쟁 거치며 위안소 탄생·확장 추적
설치와 운용은 군 작전실행 과정 이뤄져
위안부 대한 공식적인 가해 시스템 확인
순수 일본 자료로 日 강제성 구체적 입증
몇 분 남은 피해자 할머니 증언으론 한계
위안소, 일본군 범죄현장… 접근 사료 많아
위안부 → 위안소 선회 선구적 연구 의미도
‘전시 노동력 동원’ 주제로 日 연구자 길에
20세기 전반 日 역사 청산 중요성에 주목
日 잘못 바로 못 풀면 한·일 관계까지 영향
사료 읽는 게 즐거워… 연구 계속 이어갈 것
“어떻게 되는 거야. 이 문제를 다시 한번 해봐야 하는 것 아니야?”
시민운동 성격의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국제법정’(이하 시민법정)을 함께 준비했던 동료들 사이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시 한번 연구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오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일 년 전 일본에선 아베 신조 당시 일본 총리는 ‘협의의 강제성’과 ‘광의의 강제성’으로 구분한 뒤, 일본군의 강제연행을 뒷받침하는 자료와 증언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위안부의 강제성을 부인했다. 위안소의 설치와 위안부 모집, 이송에 일본군이 관여했다는 기존 연구를 깡그리 부인하는 역사수정주의였다. 일본의 역사 퇴행에 맞서, 미국 하원에선 마이크 혼다 의원 등을 중심으로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이 가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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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위안부 문제가 요동치자 시민법정을 함께 준비한 연구자들이 다시 연구회를 조직해 강제성 문제를 검토해 보기로 했다. 당시 박사학위 논문을 단행본으로 묶는 작업을 하던 하종문 한신대 교수도 옛 동료들과 함께했다. 한편으론 그동안 묵혀놨던 연구를 재개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는 기존 아시아여성기금이 만든 자료집을 면밀히 다시 읽는 한편, 다른 디지털 자료를 찾으면서 위안부의 강제성을 증명할 수 있는 기초 논문을 작성했다. 이때부터 틈나는 대로 일본 국회 회의록이나 국립공문서관이 개설한 ‘아시아역사자료센터’의 디지털 자료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특히 ‘아시아역사자료센터’에는 시민법정 당시 볼 수 없었던 많은 자료가 디지털화돼 있었다.
위안부나 위안소와 관련된 일본군 부대들의 진중일지를 읽어가면서 자료 목록과 그 내용, 작전 부대 등을 정리해 나갔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아시아태평양전쟁, 최후 결전기 등 시기별로, 만주와 중국, 동아시아 각국 등 지역별로 추적해 나갔다. 자료가 축적되자, 가릴 수 없는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전장의 위안소는 민간 성매매 업소와 달리 사실상 일본군 군사시설이었다는 사실, 위안부의 총체적인 가해시스템이었다는 사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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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현대사 연구자인 하종문 교수가 일본 군부대들의 진중일지를 통해서 위안소가 사실상 일본군의 군사시설이었음을 규명한 책 ‘진중일지로 본 일본군 위안소’(휴머니스트)를 펴냈다. 2008년 연구를 시작한 이래 무려 15년 만에 출간된 노작이다.
책은 진중일지를 토대로 1937년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어떻게 위안소 제도가 탄생했고, 전쟁과 함께 확장했으며, 오키나와 결전기에 완성돼 갔는지를 촘촘하게 따라간다. 이를 통해 전시의 위안소는 사실상 일본군 시설이었음을 증명하는 한편, 위안부의 총체적인 ‘가해시스템’이었음을 규명해내는 데 성공한다.
특히, 일본 사회의 우경화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강해진 백래시(backlash)로 최근 관련 연구도 침체돼 있는 상황에서 순수 일본 자료를 바탕으로 본격 학술서를 펴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기존 위안부 중심에서 위안소 중심으로 방향을 선회한 선구적인 연구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하 교수는 왜 전장의 위안소를 사실상 일본군 군사시설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위안부가 아닌 위안소로 연구 방향을 선회한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 교수를 지난 15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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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연구 저술의 의미는 무엇인가.
“일본군 부대들의 진중일지를 통해 일본군이 작전 상황에서 주둔 규정과 내무 규정, 위안소 규정을 만들고 위안소를 설치해 병사들을 출입시켰다는 것을 확인, 위안소의 설치 및 운용이 군의 작전 실행 과정에서 이뤄진 행위라는 것을 규명해냈다. 즉, 전시의 일본군 위안소는 사실상 군시설이라는 점이고, 위안소는 위안부에 대한 공식적인 가해시스템이라는 걸 확인한 것이다.”
위안부 연구의 선구자로 꼽히는 요시미 요시아키를 비롯한 연구자들이 진중일지를 위안소가 실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물로 삼는 데 그치거나 1993년 발표된 고노담화가 “위안소는 군 당국의 요청에 따라 마련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는 옛 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이에 관여했다”고 일본군 역할을 다소 모호하게 표현한 것과 달리, 위안소를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규명한 셈이다.
―연구 방향을 위안부가 아닌 위안소로 선회한 것도 주목된다.
“위안부 및 위안소의 강제성이나 범죄성은 그동안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규명해 왔다. 살아 계신 할머니가 이젠 몇 분 되지 않는데, 할머니들이 다 돌아가시고 난 다음엔 어떻게 할 것인가. 위안소는 일본군이 저지른 범죄 및 인권유린의 구체적인 현장으로, 접근할 수 있는 사료 역시 많이 남아 있다. 위안부 연구의 새 돌파구가 될 수 있다. 게다가 위안소 연구는 확장성도 크다. 비교연구도 가능할 뿐만 아니라 전시 여성의 성폭력 실체나 본질을 밝혀내는 데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앞으로 더 보완하거나 풀어야 할 과제가 있다면.
“일본 군인들의 회상기와 진중일지 내용을 맞춰나가면서 시기와 장소, 부대를 특정하는 작업을 추가적으로 해가야 한다. 이어서 다시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과 맞추는 작업도 후속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이 세 가지 연구가 맞아떨어지면 일본군 위안부 및 위안소의 총체적 진실이 드러날 것이다. 아울러 위안부의 이송도 좀 더 자료 정리 및 분석, 정교화 작업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국내 일부 인사들의 ‘빈곤 여성 프레임’을 강하게 비판했는데.
“일부 국내 인사들이 평시의 기지촌 앞 성매매 업소와 전장의 일본군 위안소를 동격으로 비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가난한 조선인 아버지들이 딸을 민간 성매매 업자에 팔았고, 민간 업자가 전선에서 위안소를 만드는 게 뭐가 문제냐’며 ‘빈곤 여성 프레임’을 주장해온 일본 보수 우익의 주장과 뭐가 다른가. 민간 업자가 어떻게 전시 상황에서 마음대로 기차 타고 비행기 타고 최전선까지 가서 부대 안에 위안소를 세우고 운용할 수 있겠느냐. 위안부 및 위안소는 식민 지배의 전시 여성 프레임으로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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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한문 할 수 있나?” 역사에 관심이 많던 서울대생 하종문은 4학년 무렵 국사학과 편입을 염두에 두고 교수에게 상담을 받는데, 교수가 불쑥 묻는 게 아닌가. 국사학은 아무래도 한문 자료를 많이 접해야 하는 학문 분야여서 한문을 어느 정도 읽고 해석할 수 있어야 했다. 한문을 배우지 않았던 그는 국사학과 편입을 포기했다.
그는 대신 일본을 현장 조사해 인류학적으로 연구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전공인 인류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하지만 석사과정 한 학기 만에 인류학으론 자신의 학문적 갈증을 다 풀 수 없다고 느꼈다. 오랫동안 좋아했던 역사학으로 전공을 바꿔서 일본으로 유학을 가볼까.
1986년 여름, 그는 일본 근현대사를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이듬해 2월 일본유학시험에 합격한 뒤 10월 도쿄대 일본사학과 연구생으로 입학했고, 1년 반 동안의 연구생 생활 끝에 1989년 4월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이즈음 일본의 군부, 특히 전시 노동력 동원 문제를 연구하겠다고 생각했다. 일본 근현대사 연구자 하종문의 원점이었다.
1964년 진주에서 태어나고 부산에서 자란 하종문은 일본의 전시 노동력 동원 문제를 주제로 1991년 석사학위 논문, 1995년 박사학위 논문을 차례로 발표하면서 일본 근현대사 연구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듬해 한신대 일본학과 교수로 부임한 그는 이후 단행본 ‘왜 일본은 한국을 정복하고 싶어 하는가’, ‘일본사 여행’, ‘일본 아베 정권의 역사인식과 한일관계’, (이하 공저)‘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 1∼2’, ‘미래를 여는 역사’, ‘화해와 반성을 위한 동아시아 역사인식’ 등을 펴냈다. 옮긴 책으로 ‘20세기 일본의 역사학’, ‘일본인의 전쟁관’ 등이 있다.
―연구나 학문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20세기 전반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로서 동아시아에 끼친 부정적인 역사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 라이프 워크, 평생의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역사 연구자이니까 역사적 사실, 근거를 바탕으로 출발해야 한다. 보텀업 방식으로 객관적인 자료와 사료를 읽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사실을 연결하면서 시대상이나 미래 전망을 추출해내려 했다. 사료를 읽는 게 매우 즐겁다. 50대 중반을 지나면서 사료 속에 담긴 구체성, 실감을 읽어내는 능력이 더 생겨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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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동아시아 역사 문제에 주목하는지.
“당신은 왜 일본의 역사적 잘못을 비판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일본이 저질렀던 잘못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20세기 전반 일본의 잘못을 미래지향적으로 올바르게 청산하지 않으면, 한·일 관계도 삐걱거리게 되고 결국 중국 문제에서도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역사 문제에 제대로 된 인식과 대처를 하지 않는 일본 모습은 일본의 미래에도, 일본인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터뷰 내내, 진한 콧수염과 턱수염이 인상적인 하 교수는 질문에 대해서 단 1초의 주저함도 없었다. 이야기 역시 쉼 없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답변 내용이 허투루 넘어갈 만한 것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하나하나 경험과 자기만의 사유가 쌓인 답변이었다. 하나의 주제를 15년 이상 물고 늘어진 집념의 연구자다웠다.
혼자 모니터를 보며 사료 읽는 걸 즐긴다는 그가 들려준 생활은 단순했다. 오전 6시쯤 일어나서 커피를 마신 뒤, 열심히 테니스를 치고, 학교에 가거나, 일이 없으면 낮에는 무조건 공부하고, 해가 지면 공부를 멈추며, 밤 10시가 넘으면 자고…. 가급적 모임을 만들지 않고 가지도 않으려 노력하며, 모임에 가더라도 되도록 빨리 끝내고, 지체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상가는 가급적 낮에 가고, 술은 혼술로…. 공존공영의 동아시아 공동체를 꿈꾸는 한 명의 성실한 연구자가 그렇게 우리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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