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현지 설립 8곳 찾아가 보니
2곳만 사무실서 직원 만날 수 있어
실제 법인 사무실은 운영되지 않아
국내 법망 피한 페이퍼컴퍼니 의혹
해외거래로 코인 사기 들끓자… MAS, 투자자 보호에 올인
현지법인 테라폼랩스·3AC 잇단 파산
국가 이미지 훼손에 코인규제 팔 걷어
자국 거래 규제를 해외거래까지 확대
페이퍼컴퍼니 확산도 법 개정 부추겨
코인업계 “국내 코인 발행 허용 안 돼
해외에 법인 세우는 우회로 선택한 것”
“여기에 등록하긴 했는데, 실제로 입주하지는 않았어요.”
지난 6월26일 찾은 싱가포르의 한 공유오피스 안내데스크 직원은 뜻밖의 말을 해왔다. 이곳은 카카오 출신 임원이 싱가포르에 설립한 가상자산(코인) 발행업체인 크래커랩스의 주소로 등록된 곳이다. 공유오피스 직원은 “(크래커랩스 직원은) 아무도, 한 번도 이곳에 오지 않았다”고 재차 강조했다.
31일 세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싱가포르에서 코인 사업을 하고 있다는 기업들의 사무실은 비었거나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흔할 만큼 실체를 찾기 어려웠다. 취재진은 앞서 지난 6월26∼30일 한국 기업들이 해외법인·제휴법인·자회사 형태로 싱가포르에 설립한 코인 업체 8곳의 주소지를 찾아갔지만, 실제 업체 직원을 만날 수 있었던 곳은 클레이튼 재단과 위믹스(위메이드 자회사) 2곳뿐이었다.
이들 업체가 싱가포르기업청(ACRA)에 회사 주소지로 신고한 8곳 중 3곳은 실제 사무실이 있었다. 4곳은 공유오피스에 주소지가 있었으며, 나머지 1곳은 비서대행업체의 사무실이 주소지로 등록된 사실을 확인했다. 싱가포르에서 비서대행업체는 법인 등록 주소를 제공해 해당 주소로 들어오는 우편을 받아주고 상법 업무를 대행해 주는 역할을 한다. 아로와나테크가 주소지로 등록한 비서대행업체의 직원들은 “여기는 주소만 제공할 뿐 (아로와나테크) 직원들이 여기서 일하는 건 아니다”고 설명했다. “직원들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는 질문에 이들은 “모른다”고 답했다.
공유오피스 4곳 중 3곳은 직원이 없거나 직원이 사무실에 온 흔적이 없었다. 카카오 출신 임원이 설립한 크로스랩이 주소지로 등록한 공유오피스의 안내데스크 직원은 “(크로스랩) 직원이 2∼3명 정도 되는 것 같았는데, 몇 달째 메일을 찾아가지 않고 있다”며 “사무실에 오지 않은 지 꽤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공유오피스에 위치한 회사 중 취재진이 실제 직원을 만날 수 있던 곳은 위믹스였다. 다만 위믹스에서도 2개월 전 입사한 인사관리(HR) 직원 1명을 제외하곤 모두 재택근무를 하고 있어 사무실을 둘러볼 수는 없었다. 해당 직원은 “HR, PR(언론담당), 사업 개발, 회계, 법무 부서 직원 총 15명이 일주일에 하루씩 재택근무를 하는데, 오늘은 다들 재택을 신청했다”고 설명했다. 위믹스 측은 “싱가포르의 기업 대부분은 공유오피스를 이용하고 있다”며 “위믹스는 싱가포르의 기업문화에 맞춰 주 1일 재택근무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별도 사무실을 등록한 업체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클레이튼을 제외한 두 회사(하루인베스트와 업비트APAC)는 등록된 사무실에 직원이 오간 흔적이 없었다. 싱가포르 번화가에 위치한 코인 예치서비스 업체인 하루인베스트의 옆 사무실 직원은 “(하루인베스트) 직원들이 몇 개월에 한두 명 정도 사무실에 오더라”고 전했다.
싱가포르 최대 무역항 인근 고층건물에 위치한 업비트APAC는 화려한 조명이 비추는 1층 로비와는 달리 사무실 조명은 하나도 켜져 있지 않았다. 업비트APAC에서도 “그 사무실에서 사람을 못 본 지 몇 개월 됐다”거나 “사무실에서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옆 사무실 직원들과 청소노동자의 증언이 이어졌다. 업비트APAC 측은 “재택근무와 사무실 출근을 병행하고 있고, 직원들은 최소 주 3회 사무실로 출근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업비트APAC는 업비트와 별개 법인으로 업비트와 기술 지원 및 라이선스 제휴만 맺은 관계”라고 덧붙였다.
◆페이퍼컴퍼니 의혹 받는 코인업체들
싱가포르에 ‘직원 없는 코인 사무실’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크래커랩스, 크로스랩, 스러스트, 클레이튼 등 카카오 출신 임원이 세운 코인 발행사가 ACRA에 등록할 수 있도록 도와온 회계법인 세원 관계자는 “싱가포르에 법인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싱가포르에 주소지가 있는 게 가장 중요한데, 설립 당시에는 사무실을 구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주소를 사용한다”고 말했다. 사무실을 갖추기 전에는 일단 비서대행업체 등의 주소지로 법인을 등록한 뒤, 향후 물리적인 사무실을 얻으면 그 주소로 이전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실제 사무실을 갖추는 데 얼마나 소요되는지에 대해 묻자 그는 “고객마다 다르기 때문에 범위의 폭이 굉장히 넓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싱가포르에 있는 코인 업체들이 ‘일시적으로’ 사무실 직원만 없는 상태라면 다행이지만, 문제는 이들이 처음부터 비자금 조성 등 다른 목적으로 페이퍼컴퍼니를 등록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국내 코인 업체 중 사기 혐의로 경찰과 검찰의 수사를 받는 사례가 끊이지 않고 있다.
아로와나테크는 소프트웨어사 한글과컴퓨터 김상철 회장이 비자금 조성을 목적으로 지인을 통해 세운 페이퍼컴퍼니라는 의혹을 받고 있다. 아로와나테크가 발행한 아로와나토큰은 시세 조작 의혹을 계속 받다가 결국 상장 폐지됐다. 경찰은 한컴 본사와 김 회장의 자택을 압수수색하는 등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하루인베스트는 지난 6월 돌연 출금을 중단해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 최근에는 코인 거래소 비트소닉 대표가 싱가포르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우고 허위 용역 매출을 올려 비트소닉의 매출과 영업이익을 부풀린 등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이 같은 페이퍼컴퍼니 의혹과 관련해 코인 업계에서는 “국내에서는 코인 발행이 허용되지 않는 탓에, 보다 명확한 규제를 갖춘 해외에 법인을 세우는 우회로를 택한 것일 뿐”이라고 항변한다.
한컴 관계자는 아로와나테크 페이퍼컴퍼니 의혹에 대해 “페이퍼컴퍼니라면 페이퍼컴퍼니로 볼 수 있지만, 국내에서 가상자산공개(ICO·코인 발행 업체가 거래소 상장 전 코인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고 투자금을 모집하는 행위)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싱가포르에 특수목적법인을 세워 코인 발행을 했다”며 “사업은 한국에서 백서에 있는 로드맵대로 진행했다”고 답했다. 정부가 2017년 ICO를 금지하면서 코인 발행을 위해서는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다.
세계일보 취재진은 이외에 크래커랩스, 크로스랩, 하루인베스트, 스러스트에도 해명을 요청했지만 이들 회사는 아무런 답변을 보내오지 않았다.
싱가포르에서 만난 서상민 클레이튼 재단 이사장은 “(싱가포르 소재) 페이퍼컴퍼니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등 문제가 발생한 건 사실”이라면서도 “싱가포르에 주소를 등록하는 모든 회사가 페이퍼컴퍼니는 아니다”고 강조했다. 서 대표는 “싱가포르에서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가 확실하다”며 “코인 규제가 가장 명확하게 갖춰진 나라가 싱가포르였기 때문에 클레이튼뿐 아니라 많은 기업이 싱가포르에 법인을 설립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규제 강화 나선 금융관리국
싱가포르는 그동안 ‘가상자산의 성지’로 불렸다. 코인 관련 법에 있어 코인 투자와 블록체인 기술을 구분해 코인 투자자를 보호하면서도 블록체인 기술을 지원하며 코인 시장에 친화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상황이 달라졌다. 페이퍼컴퍼니 문제 등 논란이 잇따르자 싱가포르 정부는 코인 관련 규제를 강화하고 나섰다.
재산법을 전공해 코인 관련 연구를 지속해온 켈빈 로우 싱가포르국립대 법학 교수는 “싱가포르 금융관리국(MAS)이 2022년 이후 달라졌다”고 말했다. 로우 교수는 “싱가포르는 자본시장 규모에 있어서 홍콩보다 뒤처져 있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코인 분야만큼은 선두주자가 되어 ‘가상자산 허브’로 자리 잡으려 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같은 계획이 “2022년에 다 날아갔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2022년은 싱가포르에 암흑기 같은 한 해였다. 지난해 5월 테라·루나 코인의 가격이 급락했고, 같은 해 6월에는 헤지펀드 스리 애로우즈 캐피털(3AC)이 비트코인 투자신탁사에 과도한 레버리지 투자를 했다가 파산했다. 테라 코인을 발행하는 테라폼랩스와 3AC 모두 싱가포르 소재 기업이다. 지난해 11월에는 싱가포르 국부펀드 테마섹이 투자한 코인 거래소 FTX가 파산보호를 신청하면서 테마섹이 투자금 3600억원을 전액 손실 처리하기도 했다.
로우 교수는 “외신들이 문제가 된 코인 업체에 대한 기사를 쓸 때마다 ‘싱가포르 기업’이라고 소개를 하다 보니 싱가포르는 계속해서 명성에 타격을 입게 됐고, MAS는 관련 법을 개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법무법인 KGP에서 코인 사건 관련 자문을 맡고 있는 린잉신 변호사도 “코인 시장의 규모가 커지면서 투자자를 보호할 필요성이 커졌고 리스크 관리를 위해 MAS가 법안 개정에 들어갔다”고 진단했다.
이들이 가리킨 ‘법 개정’은 지불서비스법(PSA) 개정안을 의미한다. MAS는 지난 5월 기존 싱가포르 거주자를 상대로 코인 사업을 진행하는 기업에 적용했던 PSA를 해외 투자자를 상대로 사업하는 기업에 확대 적용하는 개정안을 발표한 바 있다. 이전까지 싱가포르는 자국에서 거래되는 코인의 경우 강력하게 규제하지만, 자국에서 발행되더라도 해외에서 거래된다면 규제하지 않았다. 이러한 규제 사각지대를 이용해 싱가포르에서 코인을 발행한 뒤 다른 국가의 거래소에서 유통시키며 사기행각을 벌이는 사례가 속출하자 법안을 수정하게 됐다는 게 전문가들 설명이다.
이에 더해 MAS는 지난달 코인 회사들에 자사 자산과 고객 자산을 분리해 보관하라고 지시했다. 개인을 대상으로 코인을 대출해 주거나 예치해 주는 서비스의 이용을 제한할 것이라는 지침도 내놨다. 투자자 보호를 강화하고 시장 위험성을 낮추려는 흐름이 지속되는 모습이다. 로우 교수는 “결국 코인도 증권과 동일하게 규제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러그풀이나 시세조종, 부정거래 등 지금 드러나는 가상자산 관련 문제들은 수십년 전 증권에서도 똑같이 발생했던 문제”라며 “형태만 다를 뿐 증권과 동일한 리스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규제도 동일하게 만들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