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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하나뿐인 당구 큐에 내 삶 바쳤죠” [밀착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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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9-10 13:00:00 수정 : 2023-09-10 13: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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깎고 말리고 다듬고… ‘110번의 공정’
전국 유일 ‘수제 당구 큐’ 명맥 잇는 허경훈 명인

“당구 큐는 작대기가 아니라 과학입니다.”

큐(cue·당구봉)는 당구에서 공을 치는 막대기를 말한다. 한때 전국 18곳이던 당구 큐 제작 업체는 대부분 사라졌다. 큐를 수리하는 형식의 작은 공방을 제외하면 현재 당구 큐를 수작업으로 제작하는 곳은 경남 양산시의 ‘은성큐’가 유일하다. 그곳에선 오늘도 허경훈(66) 명인이 당구 큐 제작에 혼을 불태우고 있다.

은성큐 허경훈 대표가 작업장에서 완성된 큐를 살펴보고 있다. 은성큐는 국내 유일의 수제 큐 제작업체다.
은성큐 사무실에 허경훈 명인이 만든 큐가 종류별로 전시되어 있다. 자재나 공정에 따라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목향(木香) 은은한 은성큐의 작업장은 건조 중인 수백 개의 당구 큐가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차곡차곡 쌓여 있는 다양한 나무 패널은 큐를 만들 때 쓰인다고 한다. 허경훈 명인은 굵은 땀방울이 쏟아지는 무더운 날씨와 작업장에 날리는 희뿌연 나무 먼지를 아랑곳하지 않고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은성큐에서도 하우스(업소용) 큐를 기계로 제작하고 있다. 허경훈 명인이 기계가 잘 작동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있다.
자동화된 기계로 깎은 하우스 큐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

다른 국내외 업체는 현재 대부분 자동화 기계로 획일적 제품을 생산한다. 은성큐는 이와는 달리 100% 수작업으로 개인용 큐를 만든다. 탁월한 기술력과 수준 높은 품질을 인정받아 수출도 하고 있다.

은성큐 사무실에 허경훈 명인이 만든 큐가 종류별로 전시되어 있다. 자재나 공정에 따라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은성큐 작업장에 큐 상대(중간부터 선단까지 분리되는 부분) 맨 끝부분에 사용되는 선골이 바구니에 가득 담겨 있다.

허경훈 명인의 큐 제작은 총 110번의 치밀하고 섬세한 공정을 거친다. 수작업으로 1㎜나 1.5㎜만큼 조금씩 깎아 내어, 약 25번의 건조와 가공을 상·하대에서 반복한다. 상대는 큐의 가운데를 연결하는 조인트를 중심으로 큐의 윗부분(벗·butt), 하대는 아랫부분(샤프트·Shaft)이다. 특히 명인 스스로 개발한 홈을 파내 나무끼리 끼워 붙이는 ‘하기방식’과 큐 중간에 구멍을 뚫어 성질이 다른 나무를 접착하는 ‘코어방식’으로 큐를 더욱 강인하게 만든다고 한다.

허경훈 명인이 손으로 큐대 표면을 얇게 깎아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1mm 또는 1.5mm만큼 깎아내는 섬세한 공정이다.
허경훈 명인이 손으로 큐대 표면을 얇게 깎아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1mm 또는 1.5mm만큼 깎아내는 섬세한 공정이다.

큐의 주재료는 수령(樹齡) 10~15년의 캐나다산 단풍나무다. 단단하고 밀도가 높기 때문이다. 단풍나무는 우리나라 기후에 최적화할 수 있게 사계절을 거쳐 자연 건조한 뒤 이용한다. 나무의 휨과 뒤틀림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너무 오래 건조하면 오히려 반발력이 줄어든다. 함수율이 8~10%가 적당하다.

‘쪽붙임 방식’으로 만든 큐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허경훈 명인이 개발한 큐 중간에 구멍을 뚫어 성질이 다른 나무를 접착하는 ‘코어방식’으로 제작한 큐의 단면.

큐의 균형도 당구 경기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 4구용 큐는 손잡이 쪽(그립), 3구 스리쿠션용은 가운데, 포켓볼용은 공을 겨누는 앞쪽이 무거워야 더 효율적이다.

허경훈 명인이 건조 중인 큐의 먼지를 제거하고 있다.

명인은 “지금까지 연구하고 분석한 큐의 제작 노하우를 기록해 책으로 펴낼 생각이다. 후계자는 없지만 나중에 누구나 책을 보고 큐를 제작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고 했다.

기계로 제작하는 하우스 큐가 잘 깎였는지 큐대를 들어 한쪽 눈을 감고 확인하고 있다.

허경훈 명인은 1992년 큐 공장에 들어가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한때 호황을 누리던 당구장은 1990년대 말 경제위기를 거치고 정보기술(IT) 시대 PC방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일하던 공장이 어려움에 부닥치자 큐 제작에 자부심이 남달랐던 명인이 인수했다. 당시 큐 제작의 고됨과 함께 판로 개척이라는 녹록지 않은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하루 동안 영업을 위해 큐를 들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 4, 5층에 있는 당구장 30여곳을 찾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명함이나 놓고 가세요”라는 업주들의 싸늘한 반응뿐이었다. 한때 사업이 힘들어지자 주유소 아르바이트로 생활고를 이겨내기도 했다.

은성큐 허경훈 대표가 작업장에서 완성된 큐를 살펴보고 있다. 은성큐는 국내 유일의 수제 큐 제작업체다.
허경훈 명인이 큐 제작에 쓰이는 다양한 종류의 목재를 보여주고 있다.

고난의 행군 시기가 지나자 당구 애호인의 저변 확대와 함께 명인의 노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사실 당구는 과거 동네 한량이나 본업에 불충한 사람들이 즐기는 오락으로 치부되던 시절이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흔히 어둠을 상징하는 부정적 이미지였다.

은성큐 허경훈 대표가 작업장에서 완성된 큐를 살펴보고 있다. 은성큐는 국내 유일의 수제 큐 제작업체다.

현재 당구의 이미지는 바뀌었다. 대중적인 스포츠이면서 레크리에이션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요즘 당구장은 클래식을 들으며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스타일로 변화했다. 배우자, 아이들과 함께 즐기는 스포츠다. 한 게임을 치면 4㎞ 정도 걷는 효과가 있어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더 잘 치고 싶은 마음에 큐에도 관심을 가진다. 명인은 “개인 큐대는 사용자의 취향이나 몸무게, 신장, 스냅 힘, 그리고 성능 등을 고려해 제작된다”며 “자신만의 맞춤형 큐대를 가지고 있으면 아무래도 당구 실력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은성큐 사무실에 감사편지가 붙어 있다. 허경훈 대표는 생활이 힘들거나 재활이 필요한 환자들에게 큐를 무료로 제공한다. 또 지역 발전을 위해 기부와 지원도 아끼지 않고 있다.

허경훈 명인은 큐 제작은 하늘이 내린 천직이라고 했다. “나무 냄새를 맡으며 작업할 수 있는 이 일이 좋다”는 것이다.

허경훈 명인이 은성큐 사무실에 설치된 당구대에서 큐를 잡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은성큐 허경훈 대표(오른쪽)와 그의 아내 임귀순(61)씨. 허씨가 큐에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내의 내조가 큰 도움이 됐다.

명인은 “큐는 가족을 제외한 내 삶의 전부다. 국가대표선수들이 내가 만든 큐를 들고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 희열을 느낀다”며 “우리나라 당구 발전을 위해 스포츠계에서 한 획을 그은 사람, 이 시대에 마지막 남은 장인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양산=사진·글 남정탁 기자 jungtak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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