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중략)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 했다, 진눈깨비
진눈깨비를 떠올리기에 아직은 이른 계절. 두서너 달은 더 지나야 희끗희끗 날리는 첫눈이나마 바라다보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쑥 이 시를 꺼내 든 것은 얼마 전 기형도문학관을 다녀온 뒤로 내내 이 시를 중얼거리고 있기 때문. 특히 마지막 두 행이 좀처럼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불행해서는 아니다. 슬퍼서도 아니다. 도리어 나는 어떤 감격에 휩싸여 있다. 참을 수 없다는 듯 터져 나온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하는 대목에서 궂은 풍경 속으로 침몰하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한 인간의 소리를 듣는다. 새삼스레 전율하면서.
언제나 그렇듯 삶은 속수무책이고, 우리는 번번이 원치 않는 길 위에 서곤 한다. 그럴 때 가장 귀 기울여야 할 쪽은 아마도 ‘나’일 것이다. 나 자신의 숨소리. “이런 것은 아니었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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