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드러지게 핀 메밀꽃
더위 물러가는 9월 초 벌판 물들어
작년엔 비 많이 쏟아져 메밀꽃 실종
코로나 이후 4년 만에 축제 꽃 피워
“이젠 기후 관계없이 활짝 피울 자신”
한국 대표 문학축제 효석문화제
40여년 전 봉석회 만들고 백일장 개최
가산문학선양회 출범 뒤 전국 행사로
생가 복원·당나귀 모양 전망대 조성
알찬 행사 구성으로 방문객들 몰려
‘명이나물 대통령’으로 성장
가난한 유년시절 농사 배우며 자라
노력 끝에 전국서 가장 큰 규모 재배
올 메밀꽃 활짝 피운 ‘밑거름’되기도
“메밀밭 확대 중요… 보조금 더 줘야”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흔붓이 흘리고 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 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가산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책을 잘 읽지 않는 이들도 이 문장과 소설의 스토리는 어렴풋이 기억날 것이다. 황순원의 ‘소나기’와 함께 학창 시절 교과서에 담긴 우리나라 대표 단편소설이니 말이다.
봉평 효석문화마을로 들어서자 효석의 글솜씨 그대로다. 하늘에서 굵은 소금을 쏟아부은 듯, 산허리까지 하얀 메밀꽃이 지천으로 핀 만화 같은 풍경이라니. 소설 속 주인공들이 어디선가 불쑥 걸어 나올 것 같다. 어찌 이리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을까. 효석문화제를 한국 대표 문학축제로 만들어 가는 곽달규(70) 이효석문학선양회 이사장을 따라 허 생원과 동이 만나러 메밀꽃 사이로 걸어 들어간다.
#하얀 메밀 꽃 흐드러지게 핀 까닭은
매년 강원 평창군 봉평면 일원에서 열리는 평창효석문화제는 우리나라의 대표 가을 축제. 선선한 바람이 불면서 더위가 물러가는 9월 초에 열려 가을의 시작을 알린다. 무엇보다 광활한 벌판을 하얗게 물들이는 메밀꽃은 여심을 사로잡기 제격이다. 여기에 투박하지만 오랫동안 미각 세포가 또렷하게 기억하게 만드는 메밀 막국수에 막걸리 한잔 걸치는 작은 행복까지 누릴 수 있으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축제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3년 동안 축제는 사라졌다. 하늘도 무심하게, 지난해는 메밀꽃까지 완전히 실종됐다. 비가 너무 많이 와 물러 버리면서 꽃이 피지 않았기 때문이다. 축제는 없어도 메밀꽃이나마 즐기려던 여행자들의 기대도 그렇게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아무리 밤이 길어도 새벽은 오고 터널 끝에는 빛이 있는 법. 길고 긴 코로나19가 물러가면서 지난달 8∼17일 평창효석문화제는 우리 곁으로 다시 찾아왔다. 무려 4년 만이다. 행사장으로 들어서자 축제를 진두지휘하는 ‘수장’ 곽 이사장이 검게 탄 얼굴로 이마에 깊게 팬 주름을 더욱 늘리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내민다. 마침 소설 속 주인공으로 분장한 마당극 배우들이 한바탕 요란법석을 떨며 퍼레이드를 시작하니 축제 분위기는 한껏 달아오른다.
지난해 사라졌던 메밀꽃이 올해는 어떻게 이렇게 풍성하게 살아났는지 가장 궁금하다. “매년 메밀꽃은 지가 알아서 잘 폈지요. 봉평은 무, 배추, 감자를 주로 심고 이모작으로 메밀을 심었는데 늘 잘됐답니다. 그런데 지난해는 하도 비가 많이 오는 바람에 그만 싹도 제대로 틔우지 못하고 아예 삭아서 없어져 버렸어요. 올해도 비가 많이 온다고 해서 아주 단단히 준비했죠. 메밀 씨앗을 심을 때 물이 잘 흐르도록 고랑을 깊게 팠답니다. 또 일반 비료 대신 잘 발효된 숙성 비료를 메밀밭에 모두 뿌렸어요. 축제 직전에도 비가 좀 많이 와서 걱정했는데 올해는 멀쩡하네요. 영양이 풍부하니까 꽃이 더 잘 피고 오래가요. 이번 기회를 통해 반드시 숙성된 퇴비를 뿌려야 메밀꽃이 잘 핀다는 교훈도 얻었지요. 이제는 기후에 관계없이 매년 메밀꽃을 활짝 피울 자신이 생겼답니다.”
#한국대표 문학축제로 발돋움하다
평창효석문화제의 시작은 40여년 전 설립된 ‘봉석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은 고인이 된 박동락 초대 회장 등 봉평의 어른과 젊은이 40여명이 모여 봉평의 ‘봉’과 효석의 ‘석’자를 넣어 봉석회를 만들고 효석백일장을 시작한 것이 현재 효석문화제의 모태가 됐다. 효석백일장은 올해로 44회를 맞았다. 봉석회는 가산문학선양회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사단법인 이효석문학선양회로 문패를 바꿔 달았고 곽 이사장은 2021년부터 5대 이사장을 맡고 있다.
올해는 축제가 훨씬 성대해졌다. 곽 이사장이 4년 만에 다시 축제가 열리는 만큼 한국을 대표하는 문학축제로 발돋움시키자는 원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축제를 한층 업그레이드한 덕분이다. “가산문학선양회가 출범하면서 효석문화제가 전국 행사로 시작됐고 전국 최우수 축제로 여러 차례 선정됐답니다. 효석문화제는 올해로 22회를 맞았고 매년 9월 초 주말에 시작해 9∼10일 동안 열립니다. 이효석문학재단도 설립돼 초대 이사장으로 이효석의 아들 이우현씨가 이사장을 맡았지요. 재단에선 효석문학상을 시작했는데 대상 상금이 지난해 3000만원에서 올해 교보문고 협찬으로 5000만원으로 대폭 올랐어요. 매년 봄에 하던 백일장도 효석문화제 첫날로 옮겨 열었는데 전국에서 600여명이 참여해 시, 산문, 사생 작품을 낼 정도로 호응이 컸답니다.”
선양회는 그동안 평창군과 손잡고 이효석의 문학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많은 사업을 펼쳤다. 2007년 16억5000만원을 들여 봉평면 창동리에 생가를 복원하고 1930∼1940년대 이효석이 평양에서 거주하던 푸른집도 복원했다. 또 효석문화마을의 시그니처가 된 생가 맞은편 달빛언덕의 거대한 당나귀 모양 전망대와 북카페, 문학관도 선양회와 평창군의 작품이다. “올해는 100억원을 들여 문학관 맞은편에 2만평 규모 부지를 매입해 메밀밭을 새로 조성했고 전체 메밀밭은 15만5000평 정도로 커졌어요. 기존의 메밀밭과 이어지면서 끝도 없이 펼쳐진 소설 속 풍경을 그대로 만날 수 있답니다. 또 30억원을 투입해 흥정천으로 이어지는 달빛흐뭇낭만길도 새로 만들고 다리에는 예쁜 야간 조명도 설치했어요. 밤이면 문학관과 뒷산은 가산 선생 소설의 문장으로 아로새겨져 축제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렸습니다.”
이처럼 행사가 알차게 꾸며지면서 올해 축제 방문객은 30만명이 넘은 것으로 추산됐다. 행사 내용이 별로 없던 수십년 전 메밀꽃 필 무렵 60만명이 찾던 것과 비교하면 적은 규모지만 이 정도면 성공한 축제로 평가된다.
#명이나물 대통령이 되기까지
사실 올해 메밀꽃 송이가 크고 튼실하게 열린 이유가 있다. 곽 이사장은 어릴 때부터 농사를 지은 전문 농업인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명이나물을 재배해 ‘명이나물 대통령’으로 불릴 정도다. 이처럼 지금은 강원에서 소문난 ‘대농’이 됐지만 배고프고 가난한 시절을 보냈다. 봉평면 원길리 북길동에서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시절 6년 개근하며 상장 26장을 받을 정도로 똑부러지는 아이였지만 형들에게 밀려 중학교도 못 갔다.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공부하겠다고 애원했지만 밥 먹기도 어려웠던 시절이라 단칼에 거절당했다.
“그때 결심했어요. 돈 없어서 아이들 공부 못 가르치는 부모는 되지 않겠다고. 변변한 장비가 없던 시절이라 삽자루 끝이 닳을 정도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어요. 감자, 배추, 누에고치 등 닥치는 대로 재배했죠. 좀 잘되면 송아지 한 마리 살 정도로 벌었는데 그 돈으로 땅을 사기 시작했어요. 오로지 농사를 짓기 위해서였죠.” 다행히 농사가 잘돼 오리온, 농심, 해태 등 대기업에 감자를 공급할 기회를 얻었고 많을 때는 25t 트럭 14∼15대 물량을 납품했을 정도로 농사가 잘 됐다.
그러다 수익이 더 좋은 명이나물을 집중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했다. 인내의 시간이었다. 명이나물은 씨앗을 심고 무려 7년이 지나야 수확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에 감사하며 묵묵히 농사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끝에 지금은 전국에서 가장 큰 4만평에 달하는 명이나물 재배자로 성장했다. 덕분에 한국농촌지도자평창군연합회 회장과 강원도연합회 회장, 강원도농업인단체총연합회 회장을 맡아 강원 농업의 발전도 이끌었다.
그는 효석문화제를 더욱 키우기 위해서는 메밀밭을 늘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횡성읍의 경우 6만평에 메밀을 심으면서 경작자에게 평당 보조금 3660원을 지급했는데 그 정도면 소득을 충분히 얻을 수 있어 농가들이 관심을 갖고 심을 수 있답니다. 평창의 경우 2000원을 조금 넘는 수준인데 평당 3000∼5000원을 보조하면 봉평은 물론 평창 전체로 메밀밭이 더욱 확대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곽 이사장은 농민이 자연 환경을 지키는 중요한 역할도 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농사를 안 짓는 땅은 황폐화돼서 소멸되고 말아요. 농민은 그렇게 되지 않도록 땅을 지켜 나가는 사람들이죠. 따라서 정부가 보조금을 더 줘서 더 많은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메밀꽃이 피어 있는 시기는 보통 10여일이고 길어야 15일 정도다. 따라서 곽 이사장은 다양한 계절 꽃을 함께 심는 것도 봉평을 세계적인 여행지로 거듭나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본다. 예를 들면 황화코스모스-메밀꽃-가을국화 순으로 피도록 하면 가을 내내 꽃이 넘치는 풍경을 여행자들이 즐길 수 있다. 특히 코스모스는 서리가 내릴 때까지 오래오래 피어 있단다.
곽 이사장은 올해 축제를 바탕으로 가산의 문학을 전 세계에 알리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고 있다. “효석문화제는 문학이 어우러지기에 다른 축제와는 성격이 매우 다릅니다. 또 봉평 사람들이 똘똘 뭉쳐 직접 만들어 가는 축제이기도 해요. 시키지 않아도 주민들이 솔선수범해서 모두 나와 휴지 한 장까지 깨끗하게 치울 정도로 적극적입니다. 효석문화제는 돈을 벌기 위한 행사가 아닙니다. 선생이 태어나고 머문 봉평에서 선생의 작품을 세계에 알리는 축제랍니다. 이를 위해 규모를 더욱 키울 작정입니다. 문학을 사랑하는 분 10여명을 자문위원으로 모셨고 전문 설계자를 통해 봉평의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산천을 잘 살리며 시설부터 내용까지 매년 새롭게 보강할 계획입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학축제로 만들어 갈 테니 많이 기대해 주세요.”
◆곽달규 이사장은…
●1953년 강원 평창 출생 ●봉평초 졸업 ●봉평농협 이사 ●한국농촌지도자 평창군연합회 회장 ●한국농촌지도자 강원도연합회 회장 ●강원도농업인단체총연합회 회장 ●평창군 궁도협회 회장 ●현 이효석문학선양회 이사장 ●강원도지사 표창(1985년) ●평창 군수 표창(1991년) ●석탑산업훈장(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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