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다르크 화형당한 비운의 역사 깃든 루앙 비유 막쉐광장/투구·갑옷·칼 디자인 잔 다르크 교회 눈길/1345년 문 연 레스토랑 등 수백년 역사 고풍스런 콜롬바주 양식 건물 즐비/가장 오래된 프랑스 기계식 대시계도 만나
수백년 한자리를 지킨 돌무더기 위를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달린다.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들에겐 그저 신나는 놀이터일 테지. 야외 테이블을 차지하고 오후의 햇살을 즐기는 이들의 얼굴에도 여유로움이 넘친다. 프랑스를 구한 잔 다르크가 화형당한 루앙 비유 막쉐 광장(Place du Vieux Marche). 오랜 세월이 흘러 웃음 꽃 피는 여행지로 바뀐 광장엔 투구 모양 교회와 한켠에선 쓸쓸한 철 십자가만이 흘러간 영웅의 희미한 옛이야기를 흑백 무성영화처럼 들려준다.
◆잔 다르크의 슬픈 역사를 마주하다
프랑스 노르망디의 주도 루앙으로 들어서자 거리마다 활기가 넘친다. 파리에서 차로 두시간 거리여서 당일치기 여행지로 인기가 높은 곳이다. 루앙의 중심 비유 막쉐 광장의 나무골조가 드러나는 고풍스런 콜롬바주 양식 건물들은 동화속 세상으로 함께 달려가자고 손을 잡아 이끈다. 노천카페를 지날때 마다 맛있는 음식과 와인 향기가 흘러나오니 그냥 지나치기 쉽지 않다. 가장 전망 좋은 레스토랑 야외테이블에 주저앉아 시드르 한잔 주문한다. 사과로 만드는 시드르는 노르망디를 대표하는 와인. 알코올도수가 4∼5도라 한낮에 가볍게 즐기기 좋다.
잔디 광장위에 직사각형 모양으로 놓인 돌무더기들이 인상적이다. 형태로 미뤄 사라진 건물 주춧돌의 잔해로 보인다. 광장을 개발하지 않고 잘 보존해 지금은 걷다 지친 여행자들이 앉아서 편히 쉬며 담소를 나누는 공간으로 사랑받는 모습이다. 제1차 세계대전때 루앙은 전선의 후방 기지 역할을 했고 제2차 세계대전때는 폐허가 됐을 정도로 파괴된 아픈 전쟁의 역사를 지녔다. 또 하나의 슬픈 역사가 바로 잔 다르크다. 그리 크지 않은 광장을 절반가량 차지하고 있는 건물은 잔 다르크 교회(Eglise Saint Jeanne d'Arc). 배를 뒤집어 놓은 형상으로 길게 뻗은 회랑의 끝에 아담하게 솟은 교회는 잔 다르크가 화형당한 장소에 지어졌다.
잔 다르크 투구 모양으로 디자인한 교회 건물이 인상적이다. 멀리서 보면 화형당할때 타오르는 불꽃 같기도 하다. 양쪽이 뚫린 회랑의 지붕은 비늘 모양으로 꾸몄는데 잔 다르크의 상징인 갑옷과 긴 칼을 떠올리게 한다. 잔 다르크는 가고 없지만 이런 독특한 교회 디자인 덕분에 이곳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쉬는 것 같다. 교회 뒤쪽에 높은 철 십자가를 세웠고 바로 옆 돌무더기가 잔 다르크가 처형된 곳. 무성한 잡초 속에 ‘잔 다르크 처형대(Le Bucher de Jeanne d'Arc)’라는 작은 팻말 하나만 덩그마니 놓였다.
잔 다르크만큼 비운의 삶을 산 인물이 또 있을까.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왕위계승권 분쟁으로 백년전쟁(1337∼1453년)을 벌이던 시기, 16살의 잔 다르크는 대천사 미카엘, 성 카테리나, 성 마르가리타에게서 신의 계시를 받는다. 발루아 왕가의 샤를 왕세자를 도와 잉글랜드와 협력자인 부르고뉴 공국을 몰아내고 ‘프랑스를 구하라’는 음성이다. 이에 샤를 왕세자를 설득해 군대를 일으켜 루앙과 랭스를 탈환한다. 그의 활약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시농성에 은둔하던 샤를 왕세자는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러 정식 왕위인 샤를 7세에 오른다.
하지만 왕관을 쓰자 샤를 7세는 안이해졌고 귀족들은 잔 다르크를 시기했다. 잔 다르크는 군대를 정비해 영국군을 파리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수차례 건의했지만 이는 무시됐다. 결국 왕의 도움 없이 혼자 전쟁을 치르던 잔 다르크는 콩피에뉴 전투에서 패해 부르고뉴 군대에 체포된다. 잉글랜드는 샤를 7세에게 잔 다르크를 풀어 주는 조건으로 거액의 몸값을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샤를 7세는 끝내 무응답으로 일관한다. 이에 잔 다르크는 일곱 차례 재판에서 마녀와 이교도로 몰렸고 우상 숭배의 죄를 뒤집어쓰고 1431년 5월 30일 비유 막세 광장에서 화형당하고 만다. 완전히 재가 되도록 세 차례나 불태웠고 프랑스인들이 시신조차 가져갈 수 없게 센강에 뿌려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당시 나이가 꽃다운 19세다.
◆가장 오래된 대시계를 만나다
이런 비운의 역사와 달리 1979년 지은 잔 다르크 교회로 들어서자 그 아름다움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우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덕분. 마침 날이 맑아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밝은 햇살이 스테인드글라스의 색감을 아주 생생하게 표현한다. 한눈에도 보통 솜씨가 아닌 것 같다. 아니다 다를까. 교회를 지을 때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16세기 스테인드글라스 장인들의 작품이다. 2차 세계대전때 폭파된 생 뱅생(Saint Vicent) 교회에 있던 스테인드글라스로 잔 다르크 교회 건립때 옮겨져 새 생명을 얻었다. 교회는 밖에서 보는 것 보다 규모가 상당하며 어디에 앉아도 스테인드글라스를 감상하도록 의자를 배치해 잔 다르크 군대의 상징인 푸른 깃발과 어우러지는 풍경을 편안하게 앉아서 즐길 수 있다. 교회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다 보면 한 구석을 지키는 잔 다르크 동상 작품도 만난다.
루앙은 아주 작은 역사지구. 걸어서 모두 둘러 볼 수 있을 정도로 주요 여행지가 오밀조밀 모여 있어 다니기 편하다. 비유 막쉐 광장에서 세월이 묻어나는 골목길의 상점을 구경하며 루앙 대성당 방면을 향해 5분만 걸으면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기계식 루앙 대시계(le Gros Horloge)를 만난다. 르네상스풍의 고풍스런 금빛 시계는 한눈에도 잘 만든 걸작으로 14세기에 시간을 알려주던 종탑에 지어졌다. 분침은 없고 시침만으로 시간을 표시하는 점이 독특하며 가운데 이글거리는 태양으로 24시간을 표시했다. 6을 가리키는 로마자 ‘Ⅵ’ 아래 조각은 매일 다른 그리스 신들로 바뀌며 요일을 표시한다. 맨 위 ‘황소의 눈’으로 불리는 둥근 조형물은 달의 변화까지 보여준다니 매우 과학적이다. 웰즈 대성당 시계(Wells Cathedral Clock)보다 두배 정도 크며 제작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시계였다. 대시계 종루에 오르면 루앙 구시가지가 한눈에 펼쳐지고 멀리 끌로드 모네가 사랑한 루앙 대성당도 보인다. 이이들이 좋아하는 꼬마열차를 타면 편안하게 시내 주요 관광명소를 둘러 볼 수 있다.
◆명사들이 사랑한 레스토랑 미식 즐겨볼까
비유 막세 광장에는 1912년 영업을 시작한 르 마해쉬(les Maraichers) 등 세월이 켜켜이 쌓인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그중 1345년에 문을 연 라 쿠혼(La Couronne)은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한다. 보통 몇달씩 예약이 밀려있어 음식 맛을 보기 쉽지 않은데 운이 좋다. 예약 한 자리가 취소돼 저녁식사가 가능하다니 로또에 당첨된 기분이다. 건물 외벽에 태극기 등 여러 나라 국기 펄럭이고 있어 찾기 쉽다. 입구 복도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명사들의 사진과 서명이 가득하다.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 오드리 햅번, 그레이스 켈리, 브리짓 바르도 등 영화배우, 빅토리아 왕비 등이 이곳을 다녀갔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만찬을 한 곳이기도 하다.
2층 레스토랑에 들어서면 비유 막쉐 광장이 한눈에 보인다. 잔 다르크가 고문당하는 모습을 직원들이 이곳에서 지켜봤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한켠에선 와인 칠링버킷 4개를 바닥에 놓고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고려시대부터 그 오랜 세월 한 자리를 지킨 레스토랑이니 아무리 수리해도 빗방울이 스며들 만하다. 명성과 달리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은 아니어서 일인당 50유로 가격으로 랍스터, 생선, 스테이크 등 다양한 저녁 코스 메뉴를 즐길 수 있다. 르 마해쉬에는 가볍게 즐기기 좋은 음식들이 많다. 소고기 타다끼와 오크 숙성을 많이 하지 않아 과일향과 산도가 신선한 프랑스 부르고뉴 남단 마콩 지역의 도멘 루케(Domaine Luquet) 샤도네이 와인 한잔을 곁들이니 여행의 피로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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