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폭력성 적나라하게 고발
인간끼리 죽고 죽이는 절망 속
한줄기 희망 끝까지 놓지 않아
지난 3일은 허수경 시인의 다섯 번째 기일이었다. 촛불을 켜고 그녀의 시집들을 다시 꺼내서 읽는 것으로 고인에 대한 추모를 대신했다. 특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허수경의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을 읽으니, 전쟁에 대한 시인의 탄식과 성찰이 더 절실하게 와 닿는다. ‘시인의 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나는 이 시집에 묶인 시들을 반(反)전쟁시라고 부르고 싶다. 내가 특별히 평화주의자라서 그런 건 아니다. 다만 이 시집에 묶인 많은 시가 가깝거나 먼 전쟁의 시기에 쓰였기 때문이다.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한 인간이 쓰는 반(反)전쟁에 대한 노래, 이 아이러니를 그냥 난, 우리 시대의 한 표정으로 고정시키고 싶었을 뿐”이라고.
전쟁과 문명에 대한 문제의식은 1988년에 나온 첫 시집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원폭수첩’이나 ‘조선식 회상’ 연작을 통해 시인은 일제 강점기부터 전쟁과 분단에 이르는 가족사를 다루었다. 한국의 식민지 역사에서 비롯된 반전의식이 독일로 건너가 고고학을 공부한 이후에는 고대와 현대를 오가며 전 지구적 차원으로 확장되었다. 고대의 유적을 발굴하면서 시인은 무수한 전쟁 유물들과 유해들을 보았을 것이다. ‘새벽 발굴’이라는 시에서 화자는 “이름 없는 집단 무덤”의 유해들을 향해 “심장 없는 별을 군복 깊숙이 넣고 사는 그대들은 누구인지요”라고 묻는다. 그리고 그 잔해를 발굴하는 ‘나’는 누구인가를 되묻는다.
우리가 겪고 있는 전쟁의 나날 역시 훗날 이렇게 발굴되리라는 생각을 하면 두렵고 부끄러워 온몸이 오싹해진다. 현재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전면 봉쇄하고 일주일째 공습을 퍼붓고 있다.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먼저 공격을 한 건 사실이지만, 그에 대한 이스라엘의 보복이 도를 넘자 양쪽에 대해 국제사회의 비판과 우려가 강해지고 있다. 이스라엘군 최고 사령관은 하마스가 가자지구에 지옥문을 열었다고 하면서 그 대가는 하마스가 결코 겪어보지 못한 규모일 거라고 선포했다. 이 기회에 하마스라는 이슬람국가(ISIS)를 지구상에서 쓸어버리겠다는 것이다.
가자지구는 폭격으로 도시 전체가 초토화된 데다 전기와 수도가 끊어지고, 연료와 식량, 구호물품까지 차단된 상태다. 여기에는 237만명의 팔레스타인 주민이 살고 있는데, 폭격뿐 아니라 기아와 질병으로 희생될 민간인의 수도 급속히 늘어날 것이다. 가자지구를 둘러싼 거대한 장벽 근처에는 수십만의 이스라엘 병력이 또 다른 장벽을 만들며 지상군 투입을 준비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의 국제 대리전으로 확산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대성의 본질을 예리하게 분석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냉전체제가 끝난 뒤에도 폭력의 재배치와 재배분이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폭력은 끝난 것이 아니라 단지 시야에서 잠시 사라졌을 뿐이고, 문명화 과정을 통해 현대사회의 관료제와 합체되었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냉전의 흐름 속에서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뿐 아니라 세계 어느 곳이든 전쟁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
거대정치의 이름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는 폭력 앞에서 시와 언어는 무력하기만 하다. 그러나 허수경 시인은 인간이 같은 종의 인간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는 사실에 절망하면서도 한 줄기 희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물 좀 가져다주어요’라는 시의 화자는 아이들에게 달려가는 어머니의 얼굴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이처럼 시인의 시선은 주로 전쟁으로 희생되는 약자들을 향해 있다. ‘청동의 총’이 찍혀 있는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머니에게 제발 아이들의 안부 좀 전해주어요”라고 간청하는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하다. “아이들이 자라는 그 청동의 시간도, 그 뜨거운 군인이 될 시간도” 무사히 지나가기를, 청동의 시간 속에서도 “땅속에서 감자는 / 아직 감자의 시간을” 살기를 기원하는 마음은 오늘 우리의 기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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