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의회, 멍청이·겁쟁이·배신자 등
‘비의회적 언어’로 규정 강력 제재
회의 방해하면 퇴장·직무정지 조치
美, 인신모욕발언 금지… 거부땐 징계
제도·문화 조화 이루며 품격 갖춰
韓, 국회법 등에 발언 규범 있지만
의장 제도적권한 제대로 행사 못 해
윤리특위 구속력 없어 ‘유명무실’
핵심 정책 보다 말로 상대방 공격해
“규정 정비… 상대 존중하는 행동 필요” 하>
“하원의사규칙 43조에 따라 저에게 주어진 권한으로 존경하는 의원님께서는 오늘 남은 의사일정 동안 의회에서 즉시 퇴장할 것을 명령합니다.” 2016년 존 버커우 당시 영국 하원의장은 노동당 데니스 스키너 하원의원을 퇴장시켰다. 스키너 의원은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가 사상 최대 탈세 의혹 폭로 문건인 ‘파나마 페이퍼스’ 연루설에 대해 해명하고 있는 도중 그를 ‘교활한(dodgy) 데이브’라고 몰아세웠다. 버커우 의장의 발언 취소 요청에도 스키너 의원은 “누구보다 나라를 분열시키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사람”이라며 “나는 그를 여전히 교활한 데이브라고 부르겠다”고 더 격한 반응을 보였다. 이에 버커우 의장이 ‘의장의 지시에 계속해서 불복하는 의원에게 회의 당일 영내에서 퇴장을 명할 수 있도록 한다’는 영국 하원의사규칙 제43조를 적용한 것이다.
◆제도·문화 조화 이룬 英·美 의회
17일 국회 입법조사처 연구보고서 ‘국회의원의 말; 언어의 품격’에 따르면 영국 의회는 멍청이·거짓말쟁이·겁쟁이·배신자와 같은 단어를 ‘비의회적인 언어’로 규정하고 있다. 또 다른 의원이 토론 중이거나 본회의 의사가 진행되는 동안에 소란을 피워서는 안 된다. 이를 어길 시 의장은 원내 질서 유지를 위해 강력한 제재를 가할 수 있다. 규범 위반 수위에 따라 본회의장 퇴장, 의회 영내 퇴장, 해당 의원에 대한 직무정지 표결 등이 대표적이다. 2012년 하원의장의 거듭된 발언철회 지시를 거부한 노동당 폴 플린 의원은 5일간 직무정지의 징계를 받기도 했다.
특히 직무정지 표결을 할 때는 의장은 의원 이름을 부르는데, 이 자체가 불명예로 여겨진다. 본래 의장이 의원을 부를 때는 ‘존경하는 (지역구 이름) 의원님’으로 부르는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세 번 이상 직무정지를 받게 되면 별도의 의결이 있을 때까지 의원으로서의 직무가 정지되고, 직무정지 기간 세비가 지급되지 않는다.
미국은 하원 의사규칙 제17장 제1조에 토론 중인 의제와 무관한 발언, 인신 모욕적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 규칙을 어길 경우 의장은 해당 의원에게 주의를 시킨다. 만약 주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 표결을 할 수 있는데, 표결 결과가 위반 의원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그 의원은 발언을 중단해야 하며 견책 또는 다른 징계를 받을 수 있다. 또 미 하원은 의장이 연설하거나 의제를 상정할 때 본회의장을 걸어 다니거나 나가는 것을 금지한다. 질서를 유지함으로써 소란이 생기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미국 역시 막말을 부끄러워하는 의회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의회 문화는 다시 제도를 개선하는 등 선순환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2009년 공화당 조 윌슨 하원의원은 건강보험 개혁과 관련된 연설을 하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향해 “거짓말이야(You lie)”라고 외쳤다. 그러자 같은 당 미치 매코널 상원 원내대표는 “우리는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며 윌슨 의원을 비판했다. 윌슨 의원은 그날 밤 사과문을 발표했고, 하원은 윌슨 의원에게 공개비판의 징계를 결정했다. 이후 의사운영위원회는 하원 규칙 매뉴얼 370조에 의회 내 허용 가능한 발언과 불가능한 발언을 명시하는 가이드라인을 추가하며 규칙을 강화했다.
◆제도 무용지물 韓 국회… “보완해야”
한국도 국회법, 국회의원 윤리실천규범, 국회의원 윤리강령 등에 의원의 발언 규범을 마련해 두고 있다. 국회법에 따라 의장은 규정을 어기고 회의장 질서를 어지럽히는 의원에게 경고나 제지를 할 수 있고, 따르지 않는 경우 당일 회의에서 발언금지나 퇴장을 명령할 수 있다. 다만 한국 국회에서 의장이 특정 의원에게 공식적으로 경고·제지하거나 발언금지·퇴장을 명령한 선례는 찾기 힘들다. 국회의장에게 부여된 제도적 권한이 제대로 행사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국회 윤리특별위원회 역시 유명무실하다. 윤리특위 심사를 거쳐 의원에 대한 징계가 결정된 사안도 제13대 국회 이후 단 1건에 불과하다. 차재원 부산가톨릭대 특임교수는 윤리특위의 윤리자문기구에 권한을 더 부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차 교수는 “윤리자문기구의 자문에 구속력이 없으니 의원들은 그냥 무시해 버린다”며 “윤리 부분에서는 의원들이 일절 관여하지 않고 자문기구가 내세우는 의견을 100% 따르겠다고 입법화하지 않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지적했다. 국회법에 따라 윤리특위는 징계에 관한 사항을 심사하기 전에 윤리심사자문위의 의견을 청취해야 한다.
여권 원로인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한국의 윤리규정 자체가 허술하다고 지적했다. 김 전 의장은 통화에서 “우리 윤리규정은 두 페이지를 넘지 않는 수준으로, 어겼을 때도 아무런 제재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며 “미국은 아주 촘촘하게 돼 있어서 빠져나갈 수가 없다. 거기다 어겼을 적에는 바로 제재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얼렁뚱땅 넘어가는 식이 아니라 철저하게 제대로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컨대 국회의장이 퇴장을 명령했을 때 하지 않으면 어떤 불이익을 줄 것인지 등의 규정이 세세하게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 문화 개선·정책 능력 키워야”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선 국회의원과 대통령 스스로의 자정 노력으로 정치 문화를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도 많았다. 야권 원로인 정대철 헌정회장은 “극단적인 힘의 논리를 벗어나 대통령이 야당을 인정하고 만나고 대화해야 하고, 야당도 여당과 대통령을 인정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며 “다름을 인정하는 정치문화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지병근 조선대 교수(정치외교학)는 “대통령은 한 사람의 정치인이 아니라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포용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며 “상대를 존중하는 신중한 발언과 행동이 필요하다”고 했다.
정당이 정책 역량을 키워야 ‘막말 정치’를 끝낼 수 있다는 제언도 나왔다. 윤성이 경희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정당은 자신들의 핵심적인 정책을 가지고 다투면서 국민의 지지를 호소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런 능력이 부족하다”면서 “결국 원시적인 언어를 가지고 공격함으로써 지지자들을 동원하려고 하는 그런 행태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정책 능력이 갖춰져야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했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