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계도기간 종료 앞두고 무기 연장
종이컵 금지 철회… 비닐봉지 규제도
제조 중기업계, 일단은 가슴 쓸어내려
플라스틱 제품 2023년 수출 1위서 밀려나
中企가 수출액 48% 차지… 타격 불가피
EU 등 일회용품 규제 강화도 악화에 영향
정부 규제 방향 따라 일부 산업 고사 우려
‘매립 전제로 한 규제’ 개선 목소리 확산세
“플라스틱은 귀한 자원… 재활용에 초점을”
“금속·세라믹에 비해 가볍고 저렴
‘신의 저주’라는 오명에 씁쓸함 느껴
섣부른 정책 판단 산업 위기 초래”
“플라스틱 업계가 동태처럼 얼었다. 플라스틱 제품 제조기업 2만6000여개 중 8000여개가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아 매출이 반 토막 났다.”
비닐봉지 제조 업체인 케이아이피의 차남균 상무는 7일 이렇게 말했다. 정부는 이날 일회용품 사용 규제를 1년 만에 완화한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지난해 11월24일부터 음식점·커피전문점·패스트푸드점 매장 안의 종이컵과 플라스틱 빨대, 편의점과 165㎡ 미만 슈퍼마켓 등의 비닐봉지 사용을 금지했다. 대신 이를 어겨도 1년 동안 과태료(300만원)를 부과하지 않는 계도기간을 뒀다. 계도기간 종료(11월23일)를 앞두고 정부는 플라스틱 빨대 사용금지 계도기간을 무기한 연장하고, 종이컵 사용금지는 철회하기로 했다. 편의점과 슈퍼마켓 등 중소형 매장으로까지 확대 예정이던 비닐봉지 사용 규제도 제외했다. 다만 매장 내 플라스틱 컵 사용 규제는 유지됐다.
플라스틱 제조 중소기업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매해 강화된 ‘노 플라스틱’ 정책 기조에 업계는 이미 타격을 받을 대로 받았다는 반응이다.
◆올해 수출 1위 자리서 밀려나
24일 한국프라스틱공업협동조합연합회에 따르면 국내 플라스틱 제품 기업은 2만6000여개로 24만여명이 종사하고 있고 대부분 중소기업이다. 협회에는 1200개 업체가 속해 있다.
플라스틱은 2017년부터 국내 중소기업 수출 품목 1위를 지켜 왔다. 세부 품목에는 배터리 분리막, 포장 용기, 디스플레이 필름 등이 포함된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 중소기업이 수출한 플라스틱 제품은 51억달러(약 6조6000억원) 규모로 전체 중소기업 수출액의 4.4%를 차지했다. 전체 플라스틱 수출액에서 중소기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3분기 기준 47.9%로 대기업(32.7%), 중견기업(19.5%)보다 압도적으로 높다.
플라스틱 제품은 6년간 줄곧 중소기업 수출 품목 1위였지만, 올해엔 화장품에 1위 자리를 내줬다. K뷰티 인기로 2위 품목이었던 화장품 수출액이 크게 늘고 플라스틱 수출은 소폭 줄어서다.
중기부는 지난해부터 제조업 불황에 따라 중간재인 플라스틱 수출도 동반 하락했다고 보고 있다. 조원택 한국프라스틱공업협동조합연합회 전무이사는 “플라스틱은 ‘제품’ 비중이 20%, ‘소재·부품’ 비중은 80%로 글로벌 경제 상황에 따른 수급 영향 변화가 민감한 품목”이라고 했다.
업계는 탄소중립에 따른 전 세계적인 ‘탈(脫)플라스틱’ 규제도 수출 악화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분석한다. 유럽연합(EU) 등 주요국이 일회용품 규제를 강화하면서 필름, 봉투 등 수출이 직격탄을 맞았다는 것이다. 조 전무이사는 “플라스틱 포크, 나이프, 식기 등 수출이 감소하는 추세”라고 했다.
◆“매립 전제로 한 규제는 잘못”
여론은 정부의 일회용품 규제 완화에 비판적인 모습이지만 플라스틱 제조 업계 상황은 다르다. ‘중소기업 수출 품목 1위를 수년간 책임졌는데도 환경부나 환경단체에서는 환경오염의 주범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일종의 억울함이 누적돼 있다. 더불어 “플라스틱 재활용 시장을 정부가 키워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장욱 한국플라스틱포장용기협회 본부장은 플라스틱 빨대 사용 규제와 관련해 “종이빨대가 탄소 저감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관한 연구 결과가 분분하다”며 “매립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 폐기물 배출 총량도 변함이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플라스틱 빨대에서 종이빨대로 전환은 소재의 전환일 뿐 폐기물 감량과는 무관한 것 아니냐는 논리다. 1995년 설립된 협회에는 플라스틱 컵, 배달 용기 등을 제조하는 100여개 업체가 속해 있다.
장 본부장은 정부의 규제 방향에 따라 일부 산업이 완전히 고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 예로 도시락 조리·판매 분야를 들었다. 정부가 2003년 음식점에서 도시락을 만들어 외부로 반출할 경우 일회용 합성수지 도시락 용기 사용을 할 수 없도록 했는데 당시 도시락 산업이 완전히 죽었다는 설명이다. 이후 도시락 조리·판매업자 286명이 해당 법이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냈지만 2007년 합헌 결정이 내려졌다. 정부는 2008년 도시락 관련 플라스틱 사용제한 규제를 철폐했으나 업계는 이미 성장성을 크게 제한받은 뒤였다. 장 본부장은 “제품 하나를 규제했지만 산업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합성수지 포장재와 플라스틱 시트 제조 기업인 동성화학공업의 이재형 사장은 “규제와 정책이 따로 가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국플라스틱포장용기협회 부회장인 그는 매립을 전제로 한 규제가 잘못이라고 설명했다. 플라스틱이 썩지 않고, 화석연료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줄여야 한다는 정책 논리가 세워졌는데, 전 세계적으로 환경정책이 매립에서 재활용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에 규제도 그에 발맞춰 재활용에 맞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장은 “정부는 일회용 용기를 문제시하지만 협회 조사에 따르면 배달 용기의 80∼90%는 재활용이 된다”고 했다. 동시에 석유화학 대기업들이 플라스틱 재활용 산업에 뛰어들어 오히려 폐플라스틱을 확보하려는 전쟁이 벌어졌다고 진단했다. 이어 “플라스틱이 귀한 자원이 됐는데 매립을 기준으로 규제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광옥 프라스틱공업협동조합 연합회장 “脫플라스틱 정책, 산업 발전 걸림돌… 순환자원화 시급”
“일회용품 사용 규제의 계도 기간이 연장돼 제조 업체들의 숨통이 일시적으로 트였지만 정부의 탈(脫)플라스틱 정책은 여전히 산업 발전을 막고 있다.”
이광옥 한국프라스틱공업협동조합 연합회장은 정부가 일회용품 사용 규제 유예를 발표한 7일 이같이 밝혔다. 서울 용산구 서울역 내 대구경북기업인 라운지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는 순환경제에 부합하는 정책이 필요한 때라고 역설했다.
연합회는 1962년 중소기업협동조합법에 의해 설립된 플라스틱 산업 대표단체다. 2만6000여개 국내 플라스틱 관련 제조 업체 중 1200여개 업체가 회원사로 속해 있다. 이 회장은 2019년 2월부터 4년 넘게 연합회를 이끌고 있다.
그는 “‘신의 선물’인 플라스틱이 ‘신의 저주’라는 오명을 쓴 데 깊은 씁쓸함을 느낀다”고 했다. 금속, 세라믹과 함께 현대 3대 소재로 꼽히는 플라스틱은 1950년 이후 수요가 급증했다. 금속, 세라믹에 비해 가볍고, 썩지 않고, 값이 싸다는 게 장점이다. 자동차, 건설, 우주항공 산업까지 전 산업에 걸쳐 플라스틱이 쓰이지 않는 산업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썩지 않는다는 장점이 폐기 단계에서는 치명적인 단점이 됐다. 이 회장은 “플라스틱이 철만큼 무겁고, 나무처럼 잘 썩고, 철보다 비쌌다면 이만큼 많이 쓰이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80억 인류가 공동으로 쓸 수 있는 자원이 한정돼 있다는 점에서 플라스틱의 장점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했다.
이 회장은 “과거 폐기물이 이제는 순환자원이 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대기업들이 줄줄이 폐플라스틱 재활용 공장을 세우겠다고 발표하면서다. SK지오센트릭이 지난달 울산에 폐플라스틱 재활용종합단지 기공식을 했고, LG화학은 지난 3월 충남 당진에 폐플라스틱 열분해공장을 착공해 내년에 가동한다.
그는 “폐플라스틱 재활용 시장의 성장을 막는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밝혔다. 석유 및 석유대체연료 사업법상 폐플라스틱을 화학적으로 재활용해 만든 열분해유는 석유 정제 공정에 원료로 투입할 수 없다. 석유에서 정제한 원료만 정유·화학 공정에 투입하게 돼 있다. 이 때문에 업계는 국회에 법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이 회장은 폐기물에 대한 정부의 중장기 비전과 지원을 촉구했다. 그는 “국내 제조업에서 플라스틱 제조업은 3.4%를 차지한다”며 “산업이 차지하는 위상을 충분히 고려해 대외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지원과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