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체인 데이터’ 검증할 기관 없어
추가물량 쏟아져도 파악·제재 난항
거래소도 발행사에 공시 강제 불가
불공정거래 난무 땐 투자자만 피해
2024년 총선 탓 입법논의 지연 가능성
“백서 관리할 법정기관 등 명시해야”
한글과컴퓨터 김성철 회장의 비자금 조성 과정에 가상자산 아로와나토큰이 사용됐다는 의혹에 검찰이 김 회장의 아들과 코인 발행사 대표에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아로와나토큰은 한컴 계열사인 한컴위드가 지분을 투자한 가상자산으로 경찰은 발행사의 마케팅용 에어드롭 물량이 시세조종에 활용된 것으로 파악했다. 자전 거래를 통해 시세를 띄워 투자자들을 꼬신 뒤 대량 매도해 차익을 남겼다는 것이다.
가상자산 업계는 이 같은 일이 새롭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가상자산 발행사는 자체 유통계획을 백서 등을 통해 투자자에게 알리지만 이를 공시하거나 검증하는 기관이 없어 물량이 실제 어디서 어떻게 사용됐는지 알 방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가상자산 분석업체 관계자는 “미유통량이 시장에 쏟아져 나올 때 선제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주체가 있었다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올해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가상자산의 유통량 문제는 다시 도마에 올랐다. 지난 6월부터 X(구 트위터) 사용자들을 중심으로 수이코인(SUI)의 유통량 문제가 확산했고 더불어민주당 민병덕 의원은 “수이코인이 업비트 상장 당시와 최근 밝힌 유통량 간 차이가 6억개나 난다”며 유통량에 대한 금융당국의 조사를 촉구했다.
수이코인의 발행사는 지난 5월 업비트에 상장하면서 유통계획서를 거래소에 보냈고 7월2일, 7월24일 두 차례에 걸쳐 유통계획서를 변경했다. 최초 공개한 유통계획서와 마지막 유통계획서는 약 6억개의 물량차이가 났고 수이코인의 가격은 5월부터 지속적인 하락세를 보였다.
투자자들은 이를 두고 발행사가 유통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록업(잠금) 물량을 스테이킹(예치)한 뒤 그 이자 보상을 거래소로 유통시켰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수이 발행사측은 블록체인 성능개선 과정에서 생긴 것이라며 판매된 물량이 없다고 해명했지만 검증 시스템이 없는 상황에서 투자자들은 여전히 의혹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가상자산 유통량은 여전히 깜깜이
4일 업계에 따르면 가상자산의 유통량은 투자자에게 가장 민감한 문제 중 하나다. 아로와나 사례처럼 시장에 풀기로 약속한 물량 외에 다른 물량이 존재한다면 시세조종에 의한 급등과 급락이 발생할 수 있고 이는 투자자 피해로 고스란히 이어지기 때문이다. 유통량을 통해 가상자산 사업의 지속가능 여부를 파악하거나 가치를 산정하는 데도 어려움이 생긴다.
위메이드의 가상자산 위믹스 투자자들은 지난해 11월 위믹스에서 유통량 문제가 불거지자 장현국 위메이드 대표를 고소하고 나섰다. 추가 유통량 의혹이 불거진 이후 위믹스 가격이 70% 가까이 폭락했기 때문이다. 위믹스는 지난해 11월 5대 거래소가 모인 디지털자산거래소 공동협의체(DAXA·닥사)에서 유통량 문제로 상장폐지 처분을 받았다. 지난 9월 엔진코인(ENJ)도 블록체인 시스템을 바꾸는 과정에서 유통량이 늘어나 업비트 원화마켓에서 상장폐지되는 일이 있었다. 시세조종 의혹을 받고 있는 피카코인(PICA) 역시 2021년 업비트에서 유통량 문제로 상장폐지됐다.
블록체인은 모든 거래내역이 장부에 남는 특징을 가진다. 그럼에도 유통량 문제가 끊임없이 터지는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온체인 데이터’(거래장부)상 유통량을 감시하는 권한을 가진 주체가 없는 점을 꼬집는다. 현재로서는 발행사가 자신들의 물량을 중앙거래소로 보내면 거래소가 가진 물량과 뒤섞여 판매 여부 등을 사실상 파악하기 어렵다. 이런 일이 발생해도 발행사에 공시를 요구하거나 제재할 수단이 없다. 그러다 보니 코인을 둘러싼 유통량 의혹은 주로 가상자산 커뮤니티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먼저 제기되는 실정이다.
닥사 자문위원인 조재우 한성대 교수는 “어디까지 가상자산 유통량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정확한 기준이 없다”며 “온체인 데이터로 추측은 되는데 실제로 가상자산을 팔았는지 안 팔았는지는 파악이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거래소 등 민간업체들은 가상자산의 공시 책임을 지기 꺼린다. 발행사에 제대로 된 공시를 강제할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한 거래소 관계자는 “국내 거래소들은 각 프로젝트가 내는 공시를 게시해주는 입장에 불과하다”며 “업권법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발행사에는 공시에 대한 가이드라인이나 의무가 없는데 문제가 발생했을 때 거래소 탓만 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우려했다. 다른 거래소 관계자도 “투자자에게 정보를 주는 차원에서는 할 수 있겠지만, 의무를 지운다면 제품의 하자 책임을 마트에만 떠넘기는 셈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국내 최초 가상자산 공시플랫폼으로 등장한 쟁글은 가상자산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리베이트 의혹 등이 불거지자 지난 5월부터 공시 서비스를 중단했다.
◆가상자산 2단계 입법 논의 서둘러야
금융당국도 가상자산 공시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7월 가상자산 주석공시에 대한 모범사례를 공개하며 가상자산 발행사가 유보물량, 위탁자산, 보호수준 등 중요정보를 최대한 포함해야 한다고 밝혔다. 금융위원회도 가상자산의 유통, 발행, 공시 등이 담길 2단계 입법에 앞서 연구용역을 발주한 상태다.
하지만 내년 7월 1단계 가상자산법(가상자산 이용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시행을 앞두고 가상자산의 공시 체계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불공정거래 자체를 잡아낼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현재도 수많은 가상자산이 급등락하는 과정에서 수상한 고래(대량보유자)들의 물량이 국내외를 오가고 있지만 조사가 이뤄지는 경우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금융당국의 2단계 입법 윤곽은 내년 상반기쯤 나타날 것으로 보이지만 7월 가상자산법 시행에 맞춰 공시시스템이 갖춰질지도 미지수다. 내년 4월 총선이 예정된 상황에서 2단계 가상자산법 논의가 뒷전으로 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황석진 동국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가상자산법이 통과됐지만 가장 중요한 시행령도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며 “불공정행위 종류, 미공개 정보의 범위부터 통합공시 등은 반드시 공고해야 할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황 교수는 “가상자산 발행사들이 백서에 유통량을 명시해놓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슬그머니 추가 내용을 변경하거나 끼워 넣는 경우가 많다”며 “이런 부분을 관리하는 법적 권한을 가진 법정기관이 있어야 하고, 규정을 어긴 발행사에 대해서는 엄격한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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