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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외로움과 카페 속의 고독 [박영순의 커피언어]

입력 : 2023-12-09 14:00:00 수정 : 2023-12-08 19:5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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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잎 한장마저 떨어져 나무가 가시처럼 시려 보일 땐 커피 한 잔을 손에 쥘 일이다.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따스함 때문만이 아니다. 커피는 ‘혼자 남은 외로움’을 ‘홀로 있는 고독’으로 바꿔 놓는다.

커피를 마시는 행위는 자신을 위로하는 리추얼(Ritual·의례)이다. 잔을 들어 입으로 넣는 내가 있고, 그 커피를 목 뒤로 넘긴 뒤 피어나는 정서를 몸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내가 있다. 자각하는 인간은 비록 혼자라도 남겨지는 게 아니라 홀로 서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광야를 찾는 구도자의 심정이자 골방으로 들어가는 수도승의 정신과 같다.

커피를 마시면 무엇이든 무소의 뿔처럼 헤쳐 나아갈 신념이 생기는 것을 카페인 효과로만 설명할 수 없다. 커피의 위대한 힘은 정서를 어루만지는 부드러움에 있다. 낙엽을 태우던 이효석은 연기 속에서 커피의 향을 포착한 순간 ‘맹렬한 생활의 의욕’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나라 잃은 설움에 젖어 신음하던 정지용은 밤비가 뱀눈처럼 보이고 거리의 불빛이 흐느끼는 듯 보일 때 ‘카페 프란츠로 가자’고 절규했다.

청춘은 가고 수많은 상처만이 남은 허무함은 홀로 커피를 마시며 눈물로 씻어낼 일이다. 이난영이 부른 ‘다방의 푸른 꿈’은 커피가 발휘하는 카타르시스에 대한 예찬이다.

노고지리의 찻잔처럼 정서라고 하는 커피의 본질을 꿰뚫은 노래가 또 있을까? 갈색 탁자에 놓여 있을지언정 잔을 타고 전해지는 온기만으로 나의 몸에 정을 흐르게 만드는 커피. 이러한 면모는 오로지 홀로 고요하게 커피를 대할 때 마음으로 스며든다. 그렇다고 커피를 대할 때마다 합장할 필요는 없겠다. 고요함이란, 시장통에서도 찾을 수 있는 평정심이다.

커피애호가들에게 ‘군중 속의 고독’은 ‘카페에서의 명상’과 같은 말이다. 번잡함이 되레 집중력을 높이는 현상은 백색소음(White noise)으로 풀린다. 카페에서 공부하는 ‘카공족’은 그 공간에서 겪어 익숙해진 백색소음이 다른 소리를 덮어주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안정되고 알파파까지 증가하는 신체현상을 겪는다. 성소가 아니라 카페의 창가 자리를 찾아 묵상하는 것을 행동심리학에서는 ‘호손 효과’(Hawthorne Effect)로 설명한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심리적 긴장감을 갖게 하고, 그로 인해 능률을 오르게 한다는 가설이다.

이는 인간이기에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우리만이 가지는 독특한 능력이다. 인간을 포함해 사회를 형성하는 모든 종은 세계를 ‘우리’와 ‘그들’로 나눈다. 조직에 위험이 되는 존재를 낯설게 인식함으로써 걸러내는 진화적 장치이다. 인간은 언어나 치장을 변용함으로써 익명의 사회를 형성할 수 있었다. 익명성은 표면적인 차이를 극복하고 공존하고 상호 작용하는 문명을 낳게 했다.

카페에서 우리는 외로울 수 없다. 그것은 자처한 고독이다. 외로움은 목표가 없으나 고독은 변신(變身)이라는 지향점이 있다. 현재 자신의 좌표를 명료하게 찍지 않으면 변신할 수 없다. 설령 한다고 해도 알 수 없다.

길 위에 서 있다고 해도 간절하게 한 잔의 커피를 움켜쥐자. “고독의 시간이 있어야 자기 존재의 의미를 밝힐 수 있다”고 한 하이데거를 떠올리며 익명의 섬에 나를 들여놓는다. 함박눈이 내려 당신이 사무친다고 노래하기보다 당신을 절절히 사랑했기에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는 감성의 눈을 뜨련다. ‘연탄재 시인’의 깨우침에 따라 따뜻한 커피처럼 나도 누구에게 따뜻한 적이 있었는지도 반성해보련다. 고독은 양심을 키우는 시간이다.


박영순 커피인문학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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