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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차원의 도화지…생명으로 물들다 [박미란의 오프 더 캔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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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12-17 09:35:25 수정 : 2023-12-17 09:3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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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영의 식물상점-가만히 살아 있는 식물, 천천히 변화하는 날들

새하얀 캔버스 물감으로 채색하듯
주관적 미감 따라 관습·틀 탈피
다채로운 공간 식물들로 채워

상업공간 연출, 개인·단체전 등 활발
유한한 생명의 시간 연장하고픈
작가의 애틋하고 따스한 마음 드러나

내 공간에 처음 들인 식물은 월계수 나무였다. 작가 강은영(38)이 ‘식물상점’이라는 이름의 식물 전문 스튜디오를 운영하기 이전인 2016년도에 연희동 플리마켓에 내놓은 것을 데리고 왔다. 토분에 담긴 키가 팔 길이 남짓 되어 한 아름 안아 들기에 크지도 작지도 않아 좋아하던 나무다. 식물과 단둘이 지내는 시간은 평소보다 유난히 느리게 간다. 꼬박 기다리던 새순이 말갛게 움트는 순간에, 빛바랜 잎사귀가 하엽 지는 아쉬움 가운데, 멈추어 있던 시곗바늘이 비로소 째깍 움직이는 것이다. 월계수와 나는 연희동 집에서 두 해 정도 같이 살았다. 조각 햇빛을 보라고 창틀에 올려 두었던 화분을 실수로 떨어뜨려 깨뜨린 날에는 속상해서 조금 울었다.

월계수를 받아 온 당해 여름에 강은영이 해외로 휴가를 떠나며 작은 부탁을 했다. 작업실 현관 안팎을 가득 메운 각양각색의 식물들이 열흘 새 시들지 않도록 한 차례만 들러 물을 주면 좋겠다는 요청이었다. 당시의 나는 월계수를 돌보는 데 한창 열중하던 터라 그 사소한 일이 무척 막중한 임무처럼 여겨졌다. 내심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맡겨 준 작가에게 고맙기도 했다. 미리 받아 둔 열쇠를 들고 빈 작업실에 도착하니 한여름 땡볕 아래 푸르른 얼굴들이 저마다 애틋하고 싱그러웠다. 숨차도록 뜨거운 공기, 눈이 부신 콘크리트 땅, 지나가는 이 아무도 없는 골목 위에 살아 숨 쉬는 것은 나와 식물들뿐이었다.

물은 듬뿍 주어야 한다. 화분 속 흙을 까맣게 적시며 바닥까지 내려간 물이 다시 화분 받침의 가장자리까지 소복이 차오를 만큼. 그러고는 겉흙이 마를 때까지 며칠이고 두어야 한다. 이제 목마른 뿌리가 물을 찾으러 스스로 조금 더 뻗어 나가길 기다리는 것이다. 뿌리가 자라나야 잎을 틔울 수 있고, 잎이 튼튼해야 햇빛을 제대로 소화해낼 수 있다. 줄 때는 아끼지 않되 때맞춰 거둘 줄도 알아야 한다. 물을 지나치게 자주 주면 뿌리는 더 뻗지 않고 안주하다 썩어 버린다. 화분에 심긴 식물들은 아이처럼 보호자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 그 관심 어린 보살핌이 모자라서도 곤란하지만 결코 지나친 간섭이 되어서도 안 된다.

강은영 개인전 ‘윈도우스(Windows)’ 전시전경(2021). 학고재 제공

◆식물상점:공간 안에 식물로 그림 그리듯

강은영은 식물을 소재로 회화, 판화, 설치 등 다양한 작업을 만드는 작가이자 상업 공간의 환경을 구성하는 연출가다. 식물을 기르는 일과 작업 과정을 대조하고, 두 행위를 관통하는 요소를 고찰한다. 2017년부터 ‘식물상점’을 운영하며 미술 작가, 음악가, 기업의 전시 및 각종 프로젝트 현장의 연출을 의뢰받고 있다. 특정한 장소 안에 식물을 배치하는 과정이 종이 위에 이미지를 얹어 내는 그리기의 과정과 닮았다는 생각에 작업과 일의 경계를 엄격하게 구분짓지 않기로 했다.

작가는 시간 및 생태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식물의 모습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관찰한다. 그가 식물을 다루는 방식은 섬세하고 예민하다. 살아 있는 재료를 다룰 때에는 특히 그렇다. 장소와 사건의 특성에 어우러지는 동시에 계절과 환경이 식생에 알맞아 충분한 기간 견딜 수 있는 식물들을 선택해야 한다. 전문 플로리스트가 중요시하는 기성 관습과 법칙에 얽매이기보다는 저마다의 개체가 지닌 특성을 주관적 미감에 따라 판별하고 직관적으로 조형하기를 선호한다. 보다 창의적인 시선으로 장소를 해석하고 낯선 방식으로 식물의 군집을 구현하고자 고심한다. 화면 위에 물감을 얹어 내는 감각으로 삼차원 공간을 구성해 내는 일이다. 때로는 조화와 물감, 안료, 우레탄 폼 등 인공 재료를 공간 연출에 활용하기도 한다.

식물상점은 2020년 산타마리아 노벨라 팝업 스토어와 롯데 영플라자 팔레트 매장 내 세븐틴 팝업 스토어, 레드벨벳의 ‘밀키웨이 라이브 비디오’ 촬영 현장, 2022년 분더샵 청담에서 진행된 로얄 샬루트×리차드 퀸 팝업 스토어, 2023년 시세이도 팝업 스토어 등 다수의 기업이 진행하는 상업 프로젝트의 현장 내 식물 연출을 맡았다. 2016년 웨스트 웨어 하우스의 노상호 작가 개인전, 2022년 광주 디자인 비엔날레의 송민정 작가 전시장, 2023년 3월호 럭셔리 매거진 화보와 같은 해 갤러리아백화점 프린트 베이커리의 김선우 개인전의 외부 조경 연출 또한 식물상점의 작품이다.

작가로서의 강은영은 2015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굿-즈’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2015년 오픈베타공간 반지하, 2017년 가변크기, 2021년 학고재 디자인|프로젝트 스페이스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2017년 광주 디자인 비엔날레, 2020년 서울시립미술관, 문화역서울 284, 국립현대미술관, 아트선재센터, 2021년 프린트베이커리, 판교 현대백화점 갤러리(라흰갤러리 기획), 2022년 롯데백화점 동탄점(취미가 기획)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해 작업을 선보였다.

강은영의 ‘블루 알카넷 트리(Blue Alkanet Tree)’(2020). 아트선재센터 기획전 ‘밤이 낮으로 변할 때’ 전시전경(2020). 이의록, 강은영 제공

◆무대 뒤편의 그늘에서, 시들지 않는 것들을 상상하며

강은영이 2021년 선보인 개인전 ‘윈도우스(Windows)’는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쇼윈도의 내부 공간, 즉 무대 뒤편에 숨은 서사를 주제 삼았다. 식물로 쇼윈도를 연출하는 프로젝트를 다수 진행했기 때문에 전면 창을 지닌 전시공간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쇼윈도의 형태를 떠올렸다. 자신의 미술작업과 상업활동 사이 긴밀한 연관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낸 기획이기도 했다.

강은영이 구현한 쇼윈도 뒤편의 세계는 낯선 생명들이 서식하는 상상적 장소로서 묘사되었다. 그의 전시 공간은 살아 있는 식물과 인공 재료를 접목해 만든 유사식물로 채워졌다. 생명을 다한 식물의 잔해와 식물을 본떠 만든 조화, 그것들을 엮어 제작한 오브제가 각기 고유한 정체성을 지닌 존재로서 다루어지는 장소다. 여러 재료가 얽히고설켜 완성된 결과물은 자생하는 식물의 그림자에 머물지 않으며 하나의 새로운 개체로서 거듭난다. 이들은 살아 있는 식물과 닮은 요소를 지니고 있지만 또 다른 질감과 성질을 띤다. 특유의 푸르름을 간직하면서도 한 달 여 전시기간 내내 결코 시들지 않는 식물들이다. 한시적 생명의 시간을 조금 더 연장하고 보존하기를 바라는 작가의 애틋한 마음이 드러난다.

강은영이 작가로서 여는 전시와 식물상점의 상업 쇼룸은 보이는 형태에서나 임하는 태도 면에서나 서로 닮았다. 스스로 정체성을 정의하기가 어렵다고 고백했으나 그는 어디까지나 공간에 식물을 더하는 사람이다. 순수미술과 상업활동의 경계를 오가며, 다채로운 장소 위에 부단히 예술적인 방식으로 식물을 얹어 내는 이다. 강은영의 식물들은 기술이 대체할 수 없는 생명의 촉감을 우리 눈앞에 펼쳐 놓는다. 평소보다 더 찬란한 존재감으로, 극대화된 질감으로, 동요하는 색채로.

식물상점×모노세잡화점, ‘화훼도 시리즈’(2021). 강은영 제공

◆가만히 살아 있는 식물, 천천히 변화하는 날들

식물을 돌보다 보면 언제이고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웃자란 가지를 쳐낸 자리에서 어김없이 새싹이 돋아나고, 지나간 상처를 극복한 뒤 또 다른 봄을 맞이하는 놀라운 생명력을 마주할 때면 매번 스스로가 부끄럽다. 보이지 않는 지하에서 말 없이 뿌리를 키워 냈을 인내력을 상상하면서, 때 되면 눈물 한 방울 없이 떠나가는 마른 잎사귀의 겸허함을 생각하면서.

바깥의 소란으로부터 한 걸음 멀어져 가느다란 잎맥의 생김새를 가만히 세어 본다. 가파르게 흘러가는 매일의 시간을 잠시나마 고요하게 멈추어 두고 싶어서다. 보이지 않는 속도로 자라나는 식물의 생장에 자신의 날들을 투영해 보고, 새삼 이 순간 살아 있음에 벅차도록 감사하곤 하는 것이다. 지극히 사적인 돌봄의 행위에서 출발하였을 강은영의 작업은 보다 더 커다란 위안이 되어 관객의 시공간을 감싸안는다. 식물들은 정성껏 선별된 군집으로서, 심미적 이미지로서, 그만의 방식대로 지금의 날들을 변화시킨다.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천천히, 끝없이.


박미란 큐레이터·미술이론 및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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